버거움의 시작
"상사가 많은 게 좋아요, 적은 게 좋아요?"
직장을 다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모두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음, 없는 게 좋아요."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배고픈 게 좋아요, 배부른 게 좋아요?’ 내지는 ‘졸린 게 좋아요, 안 졸린 게 좋아요?’처럼 물으나 마나 한 어리석은 질문인지도 모른다.
‘아닌가? 차라리 '시어머니가 한 명인 게 좋아요, 여러 명인 게 좋아요?'가 더 어울리는 질문이려나?’
안타깝게도 모두가 바라는 이상과 모두가 처한 현실은 언제나 큰 괴리를 가진다.
세상 살다 보면 상사 혹은 유사상사는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즉, 내가 얼마나 잘 나가든, 내가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든 상관없이 내가 을이 되는 일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다.
권력의 정점에 선 대통령 혹은 재력의 정점에 선 대기업 오너들조차 때로는 국민들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9급으로 시작해 15년간 8급을 거쳐 현재 7급 공무원으로 재직 중인 내 입장에서 상사 혹은 유사상사는 도처에 널려있다.
업무적으로 내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은 판사, 사법보좌관 등이 있고, 행정적으로 내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과장, 국장 등이 있겠다.
상하 관계를 떠나 내가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은 그 범위가 훨씬 더 넓다.
민원인, 선배 계장님들 심지어 이제 막 들어온 후배들까지.
예전에 어느 계장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장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은 선배들이 아니라 후배들이라고, 네가 언제까지 법원에서 일할 것 같냐고, 너보다 더 오래 여기 남아있을 사람은 선배들이 아니라 후배들이라고.
내가 아직 인생의 정수를 깨닫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원체 남의 눈치를 잘 보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선배나 후배보다 내게 업무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더 신경 쓰이더라.
어쩌면 극강의 T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법원에 있는 존재의 이유가 일을 하기 위함이고, 일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해 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은 역시나 판사들이다.
나는 한때 8명의 판사님과 일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결재를 받으러 가는 직장 상사가 8명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음, 좀 심한데?’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니다.
만약 단독 재판부에서 일을 한다면 1명의 판사와 일을 할 것이고, 합의 재판부에서 일을 한대도 3명의 판사와 일을 하면 그만.
"그럼 8명은 뭐야?"
바로 약식명령이다.
형사 절차에 속하지만 1심 형사재판에는 포함되지 않아 마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님을 형님이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과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진 그런 애매한 절차.
실제로 내가 약식명령 업무를 담당할 때 나는 농담 삼아 나를 형사과의 얼자라고 표현하곤 했었다.
서자(庶子)도 아닌 얼자(孽子)다.
게다가 아버지 혹은 형님이 8명씩이나 되는 그런 얼자 말이다.
내가 굳이 얼자라는 표현을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애초에 약식명령을 ‘전담’하는 판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법원이야 사정이 어떤지 모르지만 최소한 내가 있던 법원에서는 그랬다.
아마 다른 법원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형사과에서 형사 사건을 판단하는 판사님들이 곁다리 업무로 추가 담당하는 것이 바로 약식명령이다.
그러니까 판사 1명, 계장 1명, 실무관 1명 이렇게 3명이 하나의 재판부로 이미 묶여 있는 상태에서 나는 주기적으로 약식명령 결재만 올리는 일종의 꼽사리 실무관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분들이 내게 눈치를 준 적은 없다.
그저 농담 삼아 적자(嫡子), 서자(庶子), 얼자(孽子)를 논했을 뿐 진짜 그런 관계는 아니니까.
한 번에 8명의 판사님과 일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단 판사님의 이름과 사무실 위치를 외우는 것이 내게 주어진 첫 번째 미션이었다.
업무 초반, 1층 사무실에 있는 내가 6층에 있는 판사실로 결재를 올라갈 때마다 미리 적어놓은 판사실 배치도를 한 번씩 확인하고 올라가야 했었다.
한 명의 판사에게 결재를 올릴 때마다 이동하는 기록의 수는 125건.
대형 카트에 실어도 한 수레 가득 차는 이 기록들을 가지고 가다가도 ‘어? 이 판사님 계시는 판사실이 몇 호실이었더라?’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엔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내쉬어졌다.
‘출발하기 전에 배치표 보고 왔어야 했는데……’
만약 모시는 판사님이 한 분이었다면 판사실의 위치를 헷갈려할 이유도 없었을 테지.
배치표 하나 확인하고자 125건이나 되는 기록을 다시 가지고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잠시 어둠의 기운과 미팅을 한다.
‘왠지 거기였던 거 같은데 일단 가볼까?’
나도 모르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오른다.
전혀 근거가 될 수 없는 수많은 정보들이 마치 내가 찾던 그 판사실이 거기가 맞을 거라는 논리를 끼워 맞춘다.
하지만 너덜너덜해진 내 이성의 끈이 아직 완벽히 끊어지진 않았다.
내 감이 맞았을 때 얻을 이익과 틀렸을 때 얻을 낭패감을 저울질하기 시작한다.
‘이건 도박이지.’
현실을 직시한다.
안 그래도 더운데 이 많은 기록을 쓸데없이 한 번 더 이동하는 건 당연히 매우 곤란하다.
그렇다고 내가 알지 못하는 패를 열어 성공과 실패 여부를 가르는 도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도박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를 상상해 본다.
똑똑!
“여기 결재……, 어? 여기 아니네. 죄송합니다.”
똑똑!
“어? 여기도 아니네. 안녕히 계세요.”
똑똑!
“아! 찾았다, (요놈!)”
운이 좋으면 한 번에 원하던 판사님을 찾을 수도 있지만 운이 나쁘면 판사실 순회공연을 한 바퀴 돌아야 할지도 모를 일.
나는 태생이 도박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취향이라면 육체노동이 더 내 취향에 부합한다.
‘그냥 한 번 더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지 뭐.’
결국 무거운 짐을 가지고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런 일을 겪은 뒤엔 내가 기록을 옮길 때 쓰던 전용 카트 앞뒤로 판사실 배치도를 부착해 놓는다.
카트를 밀고 가면서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역시 기억력이 다소 부족하다면 꼼꼼하기라도 해야지.
일단 판사들의 위치를 파악했다면 이제 두 번째 미션을 수행할 차례다.
각 8명의 판사님들이 가진 고유의 업무 스타일을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성향이 다르고,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비슷한 기록을 올려도 그 처리 과정은 판사마다 제각각이었다.
실제로 어느 자리에 앉든 결재권자의 업무 스타일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실무관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그래서 좀 힘들었다.
내가 맞춰야 할 사람이 8명이나 됐으니까.
내가 한 기간에 모셨던 8명의 판사님은 2명의 부장판사 그리고 6명의 평판사였다.
원래대로라면 한 번에 하나의 업무 스타일에만 맞추면 됐겠지만 이때만큼은 한꺼번에 각기 다른 8개의 스타일과 마주하게 됐으니 정신이 좀……, 혼미했다.
원칙주의자, 신중한 자, 과감한 자, 몸 좋은 자, 오침 습관이 있던 자, 다정한 자, 결재가 느린 자, 결재가 빠른 자.
이 위에 언급한 특징들이 한 사람에 하나씩 대응됐던 건 아니다.
한 사람이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여러 개의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도 했다.
분명한 건 세상은 넓고, 판사 스타일도 다양하다는 거다.
이제부터는 초반 여덟 판사의 업무패턴과 스타일을 파악하면서 겪은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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