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귀인 판사 (3)

나만 느낀 내적 친밀감

by 고장 난 배터리

그분의 질문을 시작으로 우리는 잠시 운동을 쉬며 대화를 나눴다.


“아, 네. 매일 야근을 하다 보니 체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아, 그러시구나.”


그분은 죽일 듯이 운동을 하는 내 모습이 신기했었나 보다.

하긴 그도 그럴 게 나는 나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꾸준히 검도를 수련하며 평균 이상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을 꾸준히 해온 사람은 적당히 운동했을 때의 찝찝함 때문에라도 운동시간을 허투루 때우지 않는다.

매일 야근을 하는 와중에도 일단 러닝머신을 달리면 속도 10 이하로는 달리지 않았다.


운동하는 시간이 비슷하다 보니 그분과 내가 러닝머신에서 나란히 뛰는 때가 자주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전력질주를 하는데 그분은 속보 수준으로 러닝머신을 달렸기에 아무래도 대비효과가 더 컸으리라.

그렇게 그분의 호기심으로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조금 더 이어졌다.


“제가 민사 보존계에 있는데요. 원래는 2명이 나눠서 했던 업무가 저한테 한꺼번에 넘어왔거든요. 그래서 요즘 차에서 자요.”

“네? 차에서요?”

“집에 갈 시간이 아까워서요. 매일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는데 운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매일 퇴근하자마자 여기 올라와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어휴~”

“운동 끝나면 씻고 사무실 내려가서 또 일해야 해요.”

“……”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조금 길게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넋두리를 하게 되더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그분이 판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확히 어느 재판부에 계시는지 직접 여쭤보면 3초, 내부 사무분담을 검색해 보면 5분 안에 알 수 있었지만 그때는 그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는지 굳이 알아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인상 깊었던 건 내 이야기를 듣는 판사님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나쁘지 않은 걸 넘어 매우 좋았다.

방청객의 반응이 좋으면 개그맨들의 실력이 200% 발휘된다고 했던가?

나 역시 호응 좋은 판사님과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적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이후로도 저녁 시간에 판사님을 마주치곤 했다.

인사도 않던 전과는 달리 이제는 목례 정도는 하는 사이가 됐다.

대화 자체가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기에 나는 한동안 이때의 일을 잊고 지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불현듯 이 장면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어느 날이었다.

민사과 서무 계장님이 나를 불렀다.


“얼마 전에 원장님이 과장님을 불러서 OO 씨 물어봤었대.”

“네? 원장님이 저를요? 왜요?”

“집에 못 가고 늦게까지 일하는 직원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사태파악을 하려 하신 것 같더라고.”

“네?”


우리는 법원장을 원장이라고 줄여서 호칭하곤 한다.

법원장이라 하면 행정 위계 상 차관급에 해당하고, 법원 내에서는 고등법원 부장판사와 같은 급이며, 지방법원 단위에서는 법원을 책임지는 최고 책임자다.


‘내가 만나봤던 원장님은 신규 때 그분밖에는 없는데?’


고작 9급 공무원이 법원장을 만날 일은 없다.

신규 때야 일종의 행사 차원에서 당시 법원장님이 점심 식사를 사주셨던 것이지 본래대로라면 법원장이 9급 공무원의 일을 궁금해할 리가 없다.


‘원장님이 왜 거기서 나와?’


영문을 모르는 나는 그저 서무 계장님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원장님이 노동법 전문이시잖아. 그래서 아마 OO 씨 얘기를 듣고 과장님을 부른 것 같아.”


같은 판사라도 전문분야가 다 다르다.

이 사회를 규율하는 법률의 종류가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형사법 전문, 민사법 전문, 집행법 전문, 특허법 전문, 가사법 전문……

그중에서도 원장님은 노동법의 전문가였다.


‘그래……, 서?’


아마 본인이 책임지고 있는 법원 내에서 자신의 전문분야 쪽으로 피해를 받고 있는 직원을 차마 모른 체할 수 없었으리라.

이 일이 있고 얼마 뒤 민사 과장님이 나를 불렀다.

6개월이 차면 자리를 옮겨주겠다는 것이었다.


‘어? 진짜 이게 된다고?’


지금은 직원들의 원성에 못 이겨 힘든 자리는 6개월 만에 바꿔주는 인사방식이 흔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1년 보직의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을 때였다.

아무리 힘든 자리를 가더라도 1년은 버틴다는 각오가 전 직원들의 마인드에 기본 장착되어 있던 시절이다.

그런데 6개월 만에 보직 변경을 해준다니?


“6개월 채우면 재판부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아, 민사 재판 업무를 해보고 싶었던 나의 꿈이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 건가?


‘이번 한 해는 보존계에서 썩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며 단념하고 있었는데.’


내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말 그대로 불행 중 다행이었다.


흐르는 시간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6개월이 다 채워졌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나의 보존계 생활은 드디어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조금 어이가 없었던 건 내가 고생하며 어떻게든 버텼던 그 자리는 내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2명의 업무로 나눠졌다는 것이다.

이럴 거면 애초에 왜 그런 일을 만들었던 건지……


‘이 공무원 놈들……’


나도 공무원이었지만 그때 나는 처음으로 공무원 놈들을 욕했다.


나는 불운으로 민사 보존계를 가게 되었고, 천운으로 민사 보존계를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내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마무리되었던 건지를.

그저 그때는 2명의 업무가 6개월간 내게만 몰렸던 것에 분노했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때의 일을 깊이 고민해 볼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원장님은 어떻게 내 소식을 알았지?’


이게 가장 미스터리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 고작 9급 공무원이 원장님과 서로 알고 지낼 일은 없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고작 9급 공무원의 노고를 원장님께 알려드릴 일도 없다.

원장님과 자주 대면하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원장님의 비서와 국장, 총무과장을 비롯한 총무과 직원 몇 명 정도?

그런데 그들이 굳이 원장님과 대면을 할 때 내 얘기를 꺼낼 이유는 하등 없다.

법원장을 만나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전혀 관련 없는 직원 얘기를 꺼내는 게 맥락적으로 이상하기도 하고.


‘그럼 누굴까?’


나는 그때 헬스장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눴던 그 판사님이 생각났다.


‘혹시 그 판사님이?’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서로 통성명을 했던 것도 아닌 데다 지금은 하도 오래전 일이라 그 판사님의 인상착의도 기억나지 않으니 뒤늦게나마 추적해 볼 방법조차 없다.

그저 가장 확률 높은, 아니 거의 유일한 가능성이라 생각만 하고 있을 뿐.


‘어쩐지 무지하게 다정하더라니.’


어쩌면 그 판사님 자신도 야근을 위해 운동을 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는 와중에 미친 듯이 달리는 독기 가득한 실무관을 발견하고 그의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어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만약 그분이 내 이야기를 원장님께 넌지시 건넸고, 그로 인해 내가 구제를 받은 것이라면?


‘이게 말로만 듣던 귀인인가?’


당시엔 알지 못했지만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면 어둠 속을 걷던 내게 빛이 한 줄기 비췄던 게 아닐까 싶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

나는 그때 그것을 경험했다.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 날 뉴스에서 익숙한 이름을 듣는다.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을 역임했던 OOO 변호사를 특별검사로……]


내가 역대 법원장 가운데 성함을 기억하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다.

바로 그분이었다.


“어? 나 예전에 법원에서 자면서 일할 때 나 도와주셨던 법원장님인데?”


당연하게도 그분은 나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분에게 적지 않은 내적 친밀감을 느꼈다.


때로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타인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혹은 남을 구제할 수도 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도, 그 돌이 개구리가 도약하는 발판이 되어줄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시의 원장님도, 헬스장에서 나와 대화를 나눴던 그 판사님도 그때의 일을 잊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분들의 다정함과 배려로 적잖은 위로를 받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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