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8인의 판사, 그 버거움 (2)

오침 그리고 카리스마

by 고장 난 배터리

업무 초반의 일이다.

어느 날, 급히 판사의 허부 결재를 받아야 하는 문건이 접수되었다.

처음 기록을 가지고 무턱대고 올라갔다가 어느 판사실인지 몰라 허둥댔던 기억 덕분에 나는 미리 붙여놨던 배치표를 먼저 살폈다.


‘어? 이 판사님 오늘 재판이네?’


판사실 배치표를 정리하며 각 형사 재판부마다 재판 요일이 언제인지도 함께 정리해 뒀기에 내가 결재를 올려야 할 판사님이 오늘 재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그냥 내일 갈까?’


잠시 갈등했지만 일단 발걸음을 뗐으면 못 먹어도 고하는 게 성실한 대한민국의 건아 아니겠는가.

민원인 입장에서야 일을 빨리 처리해 줄수록 좋으니 설령 판사님을 못 만나 다시 돌아오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일단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똑똑!


판사실을 두드리고 몇 초를 기다린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벌떡!


휴식용 의자에 누워 있던 판사님이 벌떡 일어섰다.


‘아, 오침 중이셨구나.’


재판이라는 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케 한다.

실무관인 나도 그런데 판사는 오죽할까.

약간의 미안한 마음을 품은 채 이제 막 잠에서 깨어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있던 판사님께 결재물을 건네 드렸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결재를 완료한 판사님이 내게 말했다.


“재판 날에는 오후 결재 올 때 2시 이후로 와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 역시 유독 피곤한 날은 점심을 먹고 오침을 하는 습관이 있다.

단 10분만 눈을 붙여도 오후의 업무능률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그러다 가끔 예상치 못한 일로 예정했던 시간보다 일찍 잠에서 깰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불쾌한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 그냥 내일 올 걸 그랬네.’


그날 나는 판사님께 엄청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최대한 연기처럼 조용히 판사실을 빠져나갔다.

이후로 그 판사님께 오후 결재를 갈 땐 재판 날이 아닌 날에도 나는 항상 2시를 넘겨 올라갔었다.

그런데 종종 3시 혹은 4시에도 오침을 하다가 깨는 모습을 보곤 했다.


‘음, 약간 내 스타일인데?’


판사는 매일 기록을 보며 사건을 머릿속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더불어 여러 법리를 따지고 관련된 판례를 검토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린다.

기가 쪽쪽 빨리는 직업이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매일 고도의 정신노동을 하다 보니 판사님 중엔 오침을 주무시는 분들을 많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 내가 만났던 판사들은 오침의 패턴이 비교적 규칙적이었다.

하지만 이 판사님은 좀 달랐다.

아마도 일을 하다가 피로를 느끼면 시간에 상관없이 잠시 수면을 취하고 다시 일에 몰두하는 스타일인 듯했다.

몽롱한 상태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하는 것이 백배는 더 나은 방법이라 나 역시 생각한다.


나 역시 간헐적 수면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유형이다.

민원인들이 빤히 보고 있는 곳에서 잠을 잘 수는 없으니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카페인의 힘으로 6시까지 버티는 게 익숙해졌을 뿐.


‘만약 나와 같은 수면 패턴을 가진 판사님이라면 맞추기 힘들겠는데?’


그래서 나는 그 이후로 부담 없이 판사실을 방문했다.

물론 처음 요구하셨던 ‘재판 날 오후 2시 이후 방문’ 원칙은 지키면서.

다른 시간대에 오침을 방해해도 딱히 뭐라 하시진 않았기에 그리 부담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들쭉날쭉한 판사님의 수면패턴에 익숙해졌다.




바로 앞에 언급했던 판사님과 한 사무실을 쓰는 또 다른 판사님의 이야기다.

두 분 다 남자였고, 연령대도 비슷했지만 대화의 온도 차는 극명했다.

앞선 판사님은 대화에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면 이 판사님은 모든 대화에 친절함에 묻어났다.


“다음번 결재는 언제쯤 올라와요?”

“현재 예정된 것으로는 O월 O일쯤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나 빨리요?”

“사실 미제가 많아서 할 수만 있다면 결재빈도를 더 올리고 싶을 정돕니다.”

“아이구, 고생하시네요.”


거의 매번 결재를 올라갈 때마다 스몰토크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다양했다.

업무량, 극성 민원인, 휴가, 결재 빈도, 검찰, 인사발령 등등.

내가 약식명령 업무를 하는 6개월 동안 가장 많은 사담을 나눈 판사님이 바로 이 분이었다.


똑똑!


“네~에~”


두 분의 판사님이 하나의 사무실을 썼지만 판사실 문을 노크할 때 가장 먼저 들려오는 건 대부분 이 판사님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에서부터 밝은 에너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몹시 명랑……, 한데?’


30, 40 남성에게 이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이 밝은 에너지가 때로는 쾌활함 혹은 명랑함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사람이라는 게 별것 아닌 것에도 대하는 마음이 180도 달라지는 법이다.

판사님의 부드러운 어조는 나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판사와 법원 직원은 직접적인 상하 관계로 얽혀 있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상하 관계처럼 움직인다.

법원 직원이 하는 업무의 관리감독권이 판사에게 있기 때문이다.

법원 직원은 결재를 올리고, 판사는 그것을 검토한 뒤 결재 여부를 판단한다.

법원 직원이 올린 초안에 문제가 없다면 결재를 해주지만 작은 결함이라도 발견된다면 수정 의견을 첨부해 반려한다.


사기업에서의 결재 빈도가 어떻게 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확실한 건 법원 내부에서의 결재 빈도가 사기업에 비해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공공기관이라는 특성상 외부로 내보내는 문서가 많고, 외부로 나가는 모든 문서는 최소 한 번 이상의 결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올린 결재물이 반려될 때마다 심장이 쫄깃해진다.

심장이 철렁한다든가 식은땀이 흐르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약간의 자책과 ‘어이쿠, 이런……’ 하는 정도로 당황하곤 한다.

15년째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이런 것은 좀체 적응이 되질 않는다.

아마 이건 내가 소심한 탓인지 모른다.


이런 나의 소심함은 결재권자의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아무래도 좀 더 엄격하고 사무적인 분들로부터 반려를 당할 때엔 당황의 강도가 살짝 더 셀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판사님을 대면할 때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항상 웃는 얼굴, 부드러운 말투로 나를 맞아주시곤 했으니까.


내가 사회초년생일 때는 단순히 ‘카리스마’란 ‘기가 센 것’ 혹은 ‘타인을 주눅 들게 하는 기세’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카리스마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카리스마는 마냥 무섭기만 한 게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먼저 움직이게 하는 힘이로구나.’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과 만만하게 생각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편안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제 능력을 모두 발휘하게 만든다.

하지만 만만함은 해야 하는 것도 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은 굳이 작은 것 하나하나 따지지 않고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그 일을 하게 만든다.

마땅히 가져야 할 업무적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카리스마가 ‘어려움’이라는 것을 매개로 발휘되지만 때로는 ‘부드러움’을 매개로 발휘되는 카리스마도 있다.

이 판사님이 딱 그러했다.


부담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을 대충 해도 될 만큼 가볍지는 않았다.

부드러움을 보여주었기에 오히려 나는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더 꼼꼼히 업무를 처리했다.


6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타 법원으로 전출하게 되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판사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이번에 옮기세요?”

“네, 좀 멀리 가게 됐습니다. OO법원으로 발령받았거든요.”

“어휴~ 그래요?”

“뭐, 다들 너무 멀리 간다고 위로를 하는데 정작 저는 괜찮습니다. 이왕 간 김에 푹 쉬고 오면 되니까요.”

“그간 고생 많으셨어요.”

“판사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8명의 판사님들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날에도 나는 이 판사님과 가장 길게 대화를 나눴다.

특별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별것 아닌 이야기라도 서슴없이 나눌 수 있었던 걸 보면 확실히 이 판사님이 편하긴 했던 모양이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이 판사님과 함께 일하면서 예전부터 TV에서만 봤던 이 단어를 나는 실제로 체감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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