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8인의 판사, 그 버거움 (3)

신속과 정확

by 고장 난 배터리

“OOOO고약OOOO 사건 피해잔데요. 이거 언제 돼요?”

“지금 일정상으로 OO월 OO일 이후나 돼야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나 오래 걸려요?”

“매일 꾸준히 처리하는데도 사건이 많아서 어쩔 수 없습니다. 좀만 더 기다려주세요.”


일선에서 일하는 공무원 입장에서 법원 업무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업무의 지연은 곧장 민원인의 전화, 즉 추가적인 업무 발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판사님, 지난번에 올린 사건의 피해자로부터 전화가 왔었습니다.”

“아, 그래요? 언제까지 말미가 있죠?”

“일단 이번 주까지는 어려울 것 같다고 얘기해 뒀습니다.”

“음, 최대한 내일까지 내려줄게요.”


하지만 판사들은 조금 다르다.

그들의 사소한 실수조차 판결문 혹은 결정문의 형태로 영구히 박제되는 탓에 일반직 공무원들과 달리 업무적으로 ‘정확’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법원은 신속과 정확을 매우 강조한다.

신속과 정확?

이게 과연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개념이던가?

이것은 마치 달고 짜고 자극적인데 살 안 찌는 음식 혹은 1시간만 자도 10시간 잔 듯 개운한 기적의 수면법과도 같은 말이다.


신속함을 달성하려면 정확도는 떨어진다.

반대로 정확도를 올리려면 신속함은 일부 포기해야 한다.

이 둘이 완벽히 반대편에 선 반비례 관계는 아니지만 둘 중 하나를 어느 정도는 양보해야 하는 관계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법원의 업무는 신속함과 정확함이 서로 상충되는 지점에 서있다.

판사들은 자신에게 올라오는 모든 결재물을 마치 실시간으로 초시계가 줄어드는 시한폭탄처럼 다뤄야 한다.

웬만하면 초시계가 0이 되기 전에 주무관에게 결재를 내려줘야 하지만 ‘정확’에 초점을 맞춰 일을 하다 보면 생각만큼 그것이 항상 지켜지진 않는다.


조금 더 일찍 내려주는 건 주무관 입장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려준 문서를 잘 보관하고 있다가 정해진 날짜에 송달을 내보내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이와 반대로 예정보다 늦게 결재를 내려 줄 경우 결재를 올린 주무관의 마음은 조금씩 조급해진다.


‘결재 좀 해달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나?’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여유를 부리며 안 하는 거라면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주무관이 판사를 재촉하길 꺼리는 이유는 오직 하나.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을 몰아붙인다는 생각 때문이다.


8명의 판사들 가운데 한두 분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판사들이 한두 번쯤 결재를 늦게 내려준 전적이 있다.

일전에 설명했듯 약식명령은 형사 사건 중에서도 곁다리 느낌이 강한 업무다.

만약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최우선 순위에서는 자연스레 밀리는 그런 비운의 업무인 것이다.


유독 바쁜 시즌이라면 약식명령 결재는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판사님들이 지연 결재를 한 전례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좀 자주 늦는 분들이 계셨다.

하루, 이틀 늦는 건 양호하다.

내가 직접 겪어봤던 가장 늦은 결재는 원래 결재가 이뤄져야 했던 날보다 10일이나 늦게 내려온 결재였다.


10일……

무려 일주일 하고도 3일이나 더 지난 시간이다.


약식명령 자리에는 피고인과 피해자의 전화가 뒤섞여 걸려온다.

물론 그 빈도로 보면 피고인의 전화가 압도적으로 더 많기는 하지만 피해자의 전화도 그리 적은 편은 아니다.


“이거 언제쯤 돼요?”


피고인이 채근하는 건 자신에게 내려지는 처분이 어떠한지를 하루라도 일찍 알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본래 딱밤도 때릴 듯 말 듯 애를 태우기보다 차라리 시원하게 한 대 때려주는 게 맞는 사람 입장에서는 훨씬 더 나으니까.

통상 피해자가 약식명령을 기다리는 건 범죄로 인해 입은 금전적 피해를 민사소송으로 청구할 때 명령문을 증거자료로 제출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각기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피고인이든 피해자든 결과가 빨리 나오기를 기다린다는 점은 같다.

안 그래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예정된 결재 일자까지 밀린다면?

담당자가 조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OOOO고약OOOO 사건인데요. 이거 언제 결과 나와요? 지난번에 전화했을 때는 OO월 OO일까지는 나온다고 했었는데.”

“업무가 좀 많아서 결재가 늦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판사님께 말씀 드릴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담당자가 늦게 처리하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아직 결재가 안 내려왔어요. 제가 확인해 보고 내려오는 대로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급기야 민원인들로부터 재촉 전화까지 걸려오기 시작하면 더 이상 나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나의 업무 해태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메신저를 이용해 조심스레 판사님께 여쭤본다.


[오늘 민원인에게 전화가 와서 여쭙습니다. 혹시 결재 언제쯤 되는지요?]


한동안 말이 없던 판사님은 폭풍 결재를 시작한다.


[OOOO고약OOOO 사건 약식명령문 서명이 완료되었습니다.]

[OOOO고약OOOO 사건 약식명령문 서명이 완료되었습니다.]

[OOOO고약OOOO 사건 약식명령문 서명이 완료되었습니다.]

……


그리고 수정할 필요가 있는 일부 결재물은 반려되어 되돌아온다.


[기록 가져가세요.]


그럼 나는 125건의 기록을 가지고 내려와 수정할 건 수정하여 다시 결재를 올리고, 처음 올렸던 초안 그대로 결재가 된 사건은 당일에 송달을 내보낸다.

만약 125건의 기록이 4시 넘어서 내려온다면?


‘오늘도 야근이구나.’


야근 확정이다.


가끔 내가 보는 동영상 플랫폼에서 이런 직장인 공감 영상이 보일 때가 있다.


5시 50분.

한 직장인이 이제 10분 남은 퇴근을 기다리며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직장상사로부터 업무 하나가 던져진다.


“OO 씨, 이거 내일까지 부탁해.”


그 말에 퇴근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직장인의 얼굴이 굳어진다.

표정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머릿속에 텔레파시로 딕션이 꽂히는 듯하다.


‘부탁? 부~타~악?’

‘부탁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지.’

‘상대방이 거절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부탁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거랍니다.’

‘안 그렇소?’


속마음에선 따지고 싶은 말들이 100만 개쯤 떠오르지만 사노비는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

이내 단념한 듯 상사의 부탁을 힘없이 받아들인다.


“……네, 알겠습니다.”


현실에서 사노비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눈물 흘리며 야근을 할 뿐.


사실 공노비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물론 퇴근 10분 전에 일거리는 넘겨주는 영상 속 극악무도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1시간 전, 2시간 전에 내려주더라도 업무의 특성상 한 번에 처리해야 하는 업무 단위가 크다면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나 원래 결재일보다 더 늦게 내려온 기록은 설령 퇴근 시간이 임박해 내려왔더라도 웬만해선 내일로 미룰 수 없다.

오늘 처리하는 것과 내일 처리하는 것에는 문서에 인쇄된 날짜에 ‘하루’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결재가 늦게 내려와서 일단 퇴근부터 하고 다음 날 처리했습니다.’


이런 비겁한 변명은 감히 꺼낼 수 없다.

그건 법원 내부의 문제고, 법원 외부에서 볼 땐 어쨌든 가능한 한 하루라도 빨리 처리해 주는 게 당연한 거니까.


법원 내에서 결재지연은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판사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이 얼마나 기록에 묻혀 살아가고 있는지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속’과 ‘정확’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는 두 마리의 토끼다.

현재로선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뾰족한 수가 마땅치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원하게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이게 현실의 딜레마다.

아마도 신속과 정확의 줄다리기는 한동안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AI 판사, AI 법원 공무원이 나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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