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출근시간, 슬리퍼, 여보세요? (1)

30분의 여유

by 고장 난 배터리

풋풋함이라는 긍정적인 단어 하나로만 설명하기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첫사랑.

처음에는 설렜다가 그다음엔 두려웠다가 종국엔 무한한 애정과 다짐으로 이어지는 첫 임신과 출산.

패기와 열정만으로 포장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던 첫 취업.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그리고 그 처음은 대부분 어설프고 심지어 처절하기까지 하다.


내가 지나온 수많은 기억들 가운데 모든 처음은 전부 약간의 부끄러움과 약간의 아쉬움 그리고 약간의 찌질함으로 덧씌워져 있다.

나의 법원 공무원으로서의 처음도 그러했다.


모든 공무원 조직이 다 같은 분위기는 아닐 것이다.

그중에서 법원 공무원 조직은 비교적 점잖은 분위기가 강하다.

직급에 상관없이 서로 예의를 차리는 데다, 전임자와 후임자 간에 업무 인수인계도 평상시 들어왔던 다른 직렬의 공무원들보다 훨씬 세심하게 이뤄진다.


“OO지방법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내년에 후임으로 가게 된 OO지방법원 OOO 주무관입니다.”

“아~ 네.”

“인수인계 차 방문하려고 하는데요. 언제쯤 시간 괜찮으세요?”


인사이동 직전에는 이런 내용의 전화가 자주 오간다.

인수인계를 얼마나 자세히 해주느냐는 전임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의 경우 후임자가 부탁하면 그걸 매몰차게 거절하는 직원은 거의 없다.


나 역시 첫 발령 때 무려 일주일 동안 인수인계를 받았었다.

내가 다른 직렬의 업무를 해본 적은 없기에 단언할 수는 없어도 아마 이렇게까지 인수인계에 심혈을 기울이는 공무원 직렬은 없을 것이다.


발령 전, 일주일간의 인수인계 그리고 본격적인 업무의 시작.

낯선 환경이었지만 선배들의 텃세는 하나도 없었다.

물론 지적은 좀 있었지만.


진심으로 생각건대 그 지적들은 내가 충분히 들을 만했다.

지금의 나라면 이제 막 들어온 후배에게서 지적할 만한 점이 보인대도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갈 것이다.


‘에휴~ 말해봤자 뭐 하냐. 일하다 보면 서서히 알아가겠지.’


그런데 내가 막 법원에 들어왔을 땐 소위 말하는 ‘무서운 선배’가 아직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마초적인 향기가 물씬 나는 그 선배들은 후배들의 마뜩잖은 부분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없었다.

나는 아마도 동기들 가운데서도 가장 지적을 많이 받았던 신규였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말 그대로 천둥벌거숭이였으니까.




사실 내가 공무원이 된 것은 편하게 일하고 싶어서였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봉사?


‘난 그냥 시험 보고 성적 돼서 들어온 건데?’


비난을 감수하고 좀 솔직해져 보겠다.

우리 대학 갈 때도 그냥 성적 돼서 들어간 거지 그 전공에 뭔가 대단한 뜻이 있어서 들어간 건 아니지 않은가?


회사를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다.

그 회사가 아니면 안 되는 건 없다.

그저 내 스펙으로 갈 수 있는 곳들 중 가장 월급 많이 주고 사내 복지 좋은 회사를 지원할 뿐.


“어려서부터 이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고……”


아니잖아요.

그거 아니잖아.


사실 공무원도 그렇다.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하는 단계부터 ‘넌 앞으로 공무원이 될 거니까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를 해야 하고……’ 같은 정신교육을 받는 게 아니다.

그냥 시험을 통해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을 검증받고 성적순으로 들어오는 것뿐이다.


누군가는 나를 비난할지 모른다.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 그런 생각을 하면 되느냐고.


물론 공무원이 된 이후에는 마음가짐을 달리 먹는 게 맞다.

확실히 우리의 월급은 사장이 주는 게 아니라 국민의 세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건 공무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부터 서서히 만들어지는 마인드일 뿐 처음부터 ‘공무원다운 사람’이 공무원이 되는 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난 그냥 편하게 살려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열심히 했고, 그 성실함의 결과로 성적이 제법 잘 나와서 법원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냥 그랬을 뿐이다.


‘설마 공무원이 6개월 동안 집도 못 가고 법원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지.’


그런데 이걸 깨달은 건 들어오고 몇 년이 지난 이후의 일.

이제 막 법원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공무원은 편하게 일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공무원이 되었고, 처음엔 마음 편히 출퇴근을 했었다.

그러다 출근시간과 관련된 첫 지적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다른 직렬 공무원들이 어떠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법원 공무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는 것이다.

어느 날, 서무 선배님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OO 씨, 잠깐만……”


조심스레 나를 불러낸 선배님은 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운을 띄웠다.


“계장님들이 OO 씨한테 얘기하라는 게 있어서요.”

“네? 저한테요?”

“그……, 출근시간 있잖아요. 신규가 9시 딱 맞춰서 오는 게 맞냐고 계장님들 사이에서 얘기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저 지각한 적 없는데요? 9시 전에 컴퓨터 켜서 로그인하고 세팅 다 끝냈는데……”

“아무래도 신규직원이니까 최소 30분 전에는 출근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말씀하셨대요.”

“아, 그렇습니까?”

“좀만 신경 써줘요.”

“알겠습니다.”


서무 선배님의 전언을 계기로 나는 그때부터 8시 30분 전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나는 회사 다닐 때 7시에 출근했는데? 신규가 8시 반 출근이면 정말 편한 거 아닌가?’


뭐, 확실히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이 없긴 하다.

굳이 비겁한 변명을 좀 해보자면 ‘전 공무원 9시까지 출근하면 되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라고나 할까?


8시 50분에 법원으로 들어와 5분 동안 컴퓨터 켜고 로그인을 한 뒤 화장실을 다녀오면 9시.


띵똥~


아침부터 민사문건을 접수하러 온 민원인의 접수번호를 기계로 띄우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업무 시작.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다.


회사를 이제 막 다니기 시작한 그때의 나는 왜 30분이나 일찍 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30분 일찍 출근하기 시작했던 그때도 컴퓨터를 켜고, 화장실에 다녀오면 남는 20분 동안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있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15년 전만 해도 서무 선배님의 조기 출근 요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30분 일찍 출근했던 내가 지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30분씩 일찍 출근하고 있다.

습관이 돼서?

그건 아니다.

일찍 일어나는 건 아무리 해봐도 적응이 안 되더라.


오히려 신규 때보다 연차가 오래 쌓인 지금 더 일찍 출근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여유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변수의 연속이다.

모든 변수를 사전에 다 예측하고 대응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변수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여유를 두는 방법이 유일하다.


남양주에서 출퇴근을 하던 때 7시에 출발을 했는데 유독 차가 막혀 9시 반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그날은 인사이동 첫날이었고, 낯선 계장님과의 첫 근무일이었다.


“계장님, 저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된 OOO실무관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출근 2시간 전에 출발했는데요. 아무리 막혀도 1시간 반 이상 안 걸리는 거린데 오늘따라 유독 차가 막혀서 조금 지각할 것 같습니다. 첫날부터 죄송합니다.”


왜 도로가 그날 그렇게까지 막혔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확실한 건 도로가 막혔고, 그로 인해 나는 지각을 했다는 점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마저도 조금 일찍 출발했기에 겨우 30분 늦는 데서 끝났다는 것이다.

애초에 딱 맞춰 출발했다면 10시 혹은 11시를 넘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각을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거의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용서받을 만한 이유보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결과를 요구한다.


‘유독 오늘따라 차가 막히더라.’, ‘알람을 분명 맞춰놨는데 알람이 고장이 났는지 울리지를 않더라’, ‘어제 새벽에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8시더라.’ 등등


이런 이유들이 거짓이 아니라 모두 진짜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럴 만한 이유가 발생하더라도 그 이유들이 언제나 예외 없이 나쁜 결과를 불러오지는 않는다.

똑같은 일을 당해도 누군가는 늦고, 누군가는 늦지 않는다.


이런 이유들은 아주 가끔 한 번씩 발생할 때만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이유가 생길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일을 그르치게 된다면 상황을 탓하기보다 나 자신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유는 적잖은 변수를 무효화시키는 좋은 수단이 된다.

아마도 계장님들이 내게 30분 일찍 출근하라 넌지시 요구했던 건 기강을 잡기 위함이 아니라 업무에 여유를 가지도록 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실 계장님들의 속마음은 알지 못한다.

그저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배움은 배움의 원인이 된 사람의 의도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화자에게 가르침의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그것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배움이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신규 때의 그 일은 지금도 내게 좋은 가르침으로 남아있다.

여유를 가지게 되면서 출근을 포함한 모든 약속에서 나는 수많은 변수를 이길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갈등과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오가는 법원이라는 공간에서, 아침 30분의 여유는 나를 지키는 가장 단단한 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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