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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 천사 Jun 04. 2023

영혼 없는 사과

  사과할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허리를 굽혀야겠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사라져 버린 순간이었다.

풀썩,

주저앉아 있고 싶었다.

살면서

이런저런 장애물을 만났지만

걸음을 멈춘 적은 없었다.

이왕에 걸어온 길

가다 보면 새로운 길이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습관처럼 오가던 생활의 길 위에는

근심의 잡초가 있어도 기쁨의 꽃들을

바라보며 힘든 것도 잊고 살았다.

혼자만 걷는 것이 아니라

그와 손 잡고 걷는 중이었던 탓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결혼했는지도 모른다.

나뭇가지에 걸린 빨간 리본을 

화살표로 읽으며 험한 산길 오르듯이.

지치는 순간마다

서로의 손을 당겨주면서

수월하게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와의

결혼생활은 만만찮았다.

순탄한 산책로였다가도 가파른 

오르막길이 되는 가 하면

추락할 것처럼

아슬아슬한 불안감도 주었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서 그랬을까.

불편한 감정의 앙금들이 

발목에 걸린 모래주머니가 되어

걸음을 무겁게 한 적이 많았다.

결혼생활이란 게 다 그래.

사는 것이 다 비슷해.

나만 힘들다 생각했는데

다들 그러면서 산다는 거야.

겉으로 보면 잉꼬부부도

속을 들여다보면

닭싸움하는 게 부부라는데.

같이 걸어도 평행선이라는 거지.


그래, 그래, 맞아하면서

결혼선배 말을 기억하며 걷고 있었지.

그런데도 예상치 못한

돌부리에 턱 걸리는 바람에

꼬꾸라 지고 말았다.

내 손잡고 걷던 남자가

남편인 줄 알았는데 원수로 돌변해

확! 밀어버린 사고가 터졌다.

순간적인 일이라 방어할 틈도 없었지.

넘어지지 않으려고 제자리에서

두 팔을 벌리고  비틀비틀하면서 

안간힘으로 균형을 잡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남편이 내 손을 잡고 걷는 척 연기하면서

다른 손을 잡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배신감보다  아픈 건

 허무감이었다.

뒤 돌아도 절벽이요 앞을 봐도 절벽이었다.

한 발만 내 디디면 날개도 없이

추락할 것 같아서 주저앉아 버렸다.

그동안

유령과 살아온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사랑을 맹세하며

결혼하자던 그 남자는 나 몰래 돌아가셨나?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어떻게

물어봐야 정답이 나오려나 고민 중이었다.

남편은  아이큐가 상당히 높은 

자신의 두뇌를 자랑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잔머리에 임기응변은 천재였다.

이런 나의 내적 고민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역시나

눈치 빠르게 선수 치며 말했다.

"여보! 미안해!"

나 몰래  즐기던 불륜이 들켰던 날이었다.

심장에 비수를 꽂아놓고

피 흘리며 신음하는 사람에게

아프지? 미안해?라는 말보다

더 황당한 말이 있을까?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그가 내민 사과는 

영혼의 먼지조차 없었다.

표현이 미숙한 것일까?  아니면 

미안함도 당황하면

저런 태도를 보이는가 했다.

놀랍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그의 미안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지?

당신에게 들키지 말아야 했는데.

그래서 미안하단 말인지?

뺨 맞고 나니 정신이 없어져

사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인지?

무릎 꿇고 고개 푹 숙이며

어떤 처분도 받을게 해도

부서진 신뢰가 복원될까 말까인데.

세상에 전시된 언어 중 가장 모욕감을 주는

단어가 있다면 이런 경우 던지는

그의 미안해가 아닐까 싶었다.

지나가다 툭 어깨를

부딪힌 낯선 타인에게 하듯이

미안해?


부글거리다 못해 끓어 넘치던

막말이 튀어나가려다 목구멍으로

따갑게 넘어갔다.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욕해 주고 싶은 걸 꾹, 참느라 

혀가 다 꼬였던 것이다.

쇗! 쇗!  기관단총

날아가는 소리만 주저할 틈을 잃고

산발적으로 튀어나가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확! 깨고 있었다.

그와의 결혼이 겨우

이런 거였다는 거지? 확인되면서

자신까지 싫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남편이란 이름표를 단 남자

남 것이라는 속뜻이 있었나 싶더라고.

내 남자라 착각한 것도 요즘 말로

촌스런 발상이었나?

순진한 발상으로 바보취급 당하는

세상이란 걸 깜박하는 순간 

제대로 뒤통수 맞은 셈이었다.

위로할 수 있는 존재는 자신 밖에 없었다.

 이렇게 살려고 결혼했다는 거지?

 아름다운 착각을 했지만 지금까지

견딘 것도 잘 산 거지.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가면 되잖아.

사는 것이 원하는 길을 만들면서 

걸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어.

인생은 영화처럼 

살고 싶지 않아도 영화가 되고 말아.

나의 삶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잖아?

나 이외의 누구든

 내 삶의 엑스트라로 배치하기로 맘먹었다.

그동안 내 삶의 감독은 내가 아니었다.

잘못된 시나리오는 내가 각색하기로

결심한 순간 햇빛이 부셨다.

너덜 해진 스토리는 삭제하고

새로운 스토리가 전개되게 하는 거야.

한 번뿐인 내 인생

내가 감독이 되어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되는 거지. 

생각을 바꾸니 이상한 설렘이

힘이 되어 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다만

살다가 사과할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허리를 굽혀야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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