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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말벌 유튜브를 보다가

by Daga

유튜브에서 장수말벌이 털보말벌 둥지를 초토화시키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털보말벌 또한 꿀벌과 비교하면 훨씬 사납고 강인한 존재였으나, 장수말벌의 위세 앞에서는 허망할 만큼 쉽게 무너졌다. 몇 마리의 장수말벌이 침입하자 집단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고, 홀로 맞서던 털보말벌들은 무력하게 쓰러졌다. 이윽고 입구 근처에 숨어 있던 무리가 일제히 반격했지만, 그마저도 허사로 끝났다.

이 장면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은 이유는 단순히 생태계의 무자비한 약육강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기묘하게도 암세포를 떠올렸다. 암세포는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 나의 세포였다. 장수말벌, 털보말벌, 꿀벌이 모두 벌목에 속하듯, 암세포도 내 몸 안에서 태어나 나의 일부로 자라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장수말벌처럼 돌변하여 같은 몸의 다른 세포들을 압박하고 죽이며 자원을 독점한다. 정상 세포들은 그 찌꺼기들로 버티다 결국 소멸한다. 암은 장수말벌을 닮았다. 같은 몸, 같은 종에서 비롯된 존재가 다른 구성원을 해치며 오직 자신만 살려는 집요한 이기심. 그 결과 몸은 마르고, 면역은 붕괴하고, 생명은 꺼져간다.

이런 생각은 생물학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내 몸의 한 부분이 전체를 해치는 구조는 도처에 존재한다. 조직 안에서든, 공동체 안에서든, 국가 시스템 안에서든, 겉으로는 같은 언어와 사명감을 내세우면서도 실상은 자원을 독식하고 타인을 소진시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암세포처럼 증식하고, 장수말벌처럼 날아들어 질서를 와해시키며, 꿀벌 같은 이들의 노동 위에 군림하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암세포가 숙주를 죽이면 자신도 죽고, 장수말벌이 꿀벌을 앗아 애벌레와 꿀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스스로 꿀을 빚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망각한 듯하다. 생명의 지속 가능성보다 당장의 생존이, 공동체의 조화보다 개인의 집착이 앞서는 구조. 질병으로는 암, 사회로는 약탈, 마음으로는 끝없는 욕망이다.

나는 문득 암세포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하게 되었다. 암세포는 ‘악한 것’이 아니라 ‘멈추지 못하는 것’이라고. 멈춰야 할 때 멈추지 않고,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으며, 자신의 경계를 잃고 무한히 증식하는 것. 살라는 신호가 과도해져 오히려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장수말벌 또한 그러하리라. 생존이라는 본능이 때로는 닮은 존재를 살해하는 방식으로만 발현된다. 이기적인 생존이 전체 생명을 파괴로 이끄는 아이러니, 그것이야말로 세계가 품은 구조적 역설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구조 안에서 너무도 자연스레 장수말벌이 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타인 또한, 내 몸의 세포 또한.

그렇기에 꿀벌의 존재는 더욱 소중하다. 꿀벌은 꿀을 빚는다. 협력하며, 질서를 수호하며,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 자신을 무한 복제하는 데 혈안이 되지 않고, 파괴를 통해 성장하지 않는다. 정해진 수명과 역할을 다하며 전체를 살린다. 그것은 결코 나약한 일이 아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다음 세대를 잇고, 구조를 고요히 작동시키는 힘. 꿀벌은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지탱한다.

내 몸 또한 마찬가지다. 수많은 세포들이 스스로를 조율하고, 필요할 때 자발적으로 소멸하며, 전체를 위해 경계를 지킨다. 나는 그 거대한 내부 질서를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지만, 그것이 무너질 때 모든 것이 붕괴한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암보다 더 두려운 것은, 꿀벌 같은 세포들이 하나둘 기능을 멈추는 순간이다.

장수말벌도, 털보말벌도 자연의 일부이며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약탈자 또한 필요할 때가 있고, 죽음을 유도하는 세력 또한 균형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꿀벌이 사라지고 장수말벌만 남은 생태계가 끔찍한 이유는 분명하다. 꿀이 사라지고, 꽃이 사라지고, 결국 생명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사피엔스를 떠올린다. 인류는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라 불렀으나,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우리가 지나간 자리마다 다른 종들이 멸종했다. 멈추지 못하고, 끝없이 확장하며, 장수말벌과 암세포처럼 숙주가 되는 지구를 갉아먹어 왔다. 만약 우리가 꿀벌의 길을 잃고 장수말벌의 속성만 붙든다면, 인류는 생존을 얻는 대신 삶의 터전을 잃을 것이다. 암이 숙주를 죽여 결국 자신도 죽는 것처럼, 사피엔스도 스스로의 무덤을 파게 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꿀벌의 존재 가치는 단순한 생태의 상징이 아니라 우리 종에게 주어진 경고다. 사회도, 몸도, 인류 전체도 꿀벌처럼 자신을 절제하고 조율하며, 멈춰야 할 때 멈추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혜로운 자’라는 이름은 비극적 아이러니로 남을 것이다.

나는 꿀벌의 가치를 잊지 않으려 한다. 사회도, 몸도, 마음도 꿀벌 같은 존재들이 제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잘 보살펴야 한다. 장수말벌의 속성만 남은 세상은 무섭도록 정적일 것이다. 살아 있으되 더 이상 살 수 없는 구조, 고요하나 이미 죽은 질서. 꿀은 고요히 빚어지는 것이며, 그 고요를 수호하는 힘이야말로 생명을 지탱하는 진정한 역량이다. 나는 내 안의 벌들이, 그리고 우리 종이, 영원히 꿀벌로 남아 있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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