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Oct 12. 2023

참고 맞추던 어제여 안녕

옷을 입으며 배워 나가는 나다움에 대하여

예쁜데 탁한 옷. 

그게 딱 내가 고르는 옷의 공식이었다. 보기엔 괜찮지만 화려하진 않을 것. 예쁘지만 튀는 것은 삼가할 것. 그런 방식으로 옷을 골라냈다. 분명 마음에 드는 것은 싱그러운 야자수가 그려진 오색찬란한 화려함의 극치인 그 원피스였다. 몇 번을 손에서 쥐락펴락 했다 내려놓았다.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그 가게를 지나갈 때 그 옷이 있을까 기웃거리기도 했다. 머릿속에선 그 발랄함이 잊혀지지 않았는데. 죽어도 입을 자신이 없었다. 왜 그렇게 입었냐는 소리가 귀에서 윙윙 울렸다.


튀는 옷을 삼가는 나처럼 모가 난 낸 모습을 꼭꼭 여미는 나였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나는 할 말도 참 많았는데 다 숨기고 말았다. 인간관계는 그리 해야 되는 줄 알았다. 나를 내려놓고 상대에게 맞추고 배려하는. 그런데 말이다. 그것도 정도가 있지. 자꾸만 맞추고 배려하면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인 줄 아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대가 문제라 생각했지만 실은 내가 문제였다. 내가 싫다고 말하지도, 그건 안 하고 싶다고 말한 적 없었으니. 그저 튀지 않고 밝고 둥그렇게 살아가야만 사랑받는다고만 생각했기에 나를 꼭꼭 내리눌렀다.














아름다운 가게에는 평범하고 무난한 스타일도 많지만 재기 발랄한 스타일의 옷이 많았다. 레이스가 가득한 상의는 기본, 꽃천지로 빛이 나는 시폰 블라우스는 매장의 단골 아이템이었다. 평소 옷가게에서라면 절대 사지 않을 옷들을 하나 둘 입어보기 시작했다. 피팅 룸에서 여러 번 옷을 갈아입어도 나를 말리는 분들은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눈치껏 옷을 적당히 갈아입었다. 매장이 널널한 날이면 신이 나서 옷을 몇 가지나 껴 입었는지 모르겠다. 


얌전한 옷들만 내게 어울리는 줄 알았으나 의외로 화려하고 과감한 옷들도 잘 어울렸다. 등이 시원하게 파진 셔링 블라우스를 시작으로 한쪽 어깨가 드러난 언 밸런스 한 티도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다만 거기서 산 옷들을 바깥에서 입고 다니는 게 중요했는데 그러기엔 소심한 내게는 용기라는 것이 필요했다. 




수영을 배울 때도 시커먼 등이 U자로 파진 수영복을 입었더랬다. 등이 X 자 선으로 꼬인 수영복을 한번 샀는데 선을 따라 울퉁불퉁 튀어나온 등살을 봐주기 어려웠다. 디자인이 화려하고 예쁜 수영복들은 거의가 등 파짐이 엑스자 선으로 되어 있는데. 예쁜 것을 입기 위해선 내 등살의 도드라짐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무도 내 등살을 보고 무어라 하는 사람 하나 없는데. 왜 그렇게 의식했을까. 내가 나를 보는 시선이 엄격했던 것이다. 나는 주문을 외웠다. ‘등살이 다 튀어나와도 아무도 너를 쳐다보지 않을 테야. 마음껏 입어보라고.’


수영복 가방에 두 눈을 질끈 감고 형광빛이 화려한 엑스자 끈의 수영복을 집어넣었다. 그 옷 밖에 없으니 입을 수밖에. 물속으로 걸어가는 내내 신경 쓰였는데 수영을 해보니 오히려 할 맛이 났다. 화려한 수영복에 기분까지 업 되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도 쨍한 수영복을 입는 건 조금 불편했는데 한참을 넘기니 검은 수영복은 시시해서 보기도 싫었다. 그 순간만 버티면 다 해결될 일이었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산 녹색 스퀘어 원피스도 그랬다. 목주변이 많이 파진 그 원피스는 어쩜 허리가 없는 내 체형에 쏙 들어맞았다. 그걸 입었을 때 느낌은 왠지 공주님이 된 것 같았다. 집에서 몇 번이고 원피스를 입어봤지만 차마 밖에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에이 나도 몰라.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밖에 입고 나서서 불편한 시간을 견뎠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고 수군거리지 않더라. 정말 화려한 원피스였는데 그 화려함에 오히려 내가 묻혀버렸다. 쨍쨍한 드레스 같은 원피스를 입고 거리를 걸으니 발걸음마저 우아해지더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옷도 사람의 걸음걸이를 만들었다. 그날은 내가 생각해도 자태가 우아하고 고고했다. 




무던하게 입을 때는 입이 쑥 들어갈 일도 내 멋대로 입기 시작한 게 한 수였을까. 멋스럽게 입은 날은 제법 할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가마니처럼 가만히 있던 어제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뭔가 배울 자리에서 일어나 발표도 서스름 없이 했다.(입이 벌벌 떨렸지만 말이다) 의견을 하나로 모아서 조율하는 내 모습이 나 스스로에게도 멋져 보였다. 제일 끝자리에 앉아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튀지 않게 묻어가는 걸 더 선호했는데 말이다. 

옷에는 어떤 마법의 힘이 있던지, 누가 스타일이 멋지다 나를 칭찬하지 않아도 스스로 차려입은 날에는 더욱 자신감이 실렸다. 패션이 내면의 나를 드러내는 도구라 하더니 용기 있게 입었더니 마음에도 날개가 달렸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던 불편한 순간을 버텼더니 나는 조금 더 씩씩한 사람이 되었다. 옷이 뭐길래.








나를 표현하는 일은 그래도 어렵다. 

평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무슨 소릴 들을까 두려운 마음도 실은 가득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진실했냐는 것이다.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옷을 입는 것에 있어서도 내가 지닌 가치관과 신념을 진솔한 마음으로 드러낸다면 평가에 넘어지더라도 덜 아플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의 기대에 맞추기보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바를 표현한 것이라면 욕을 들어도 비난을 받아도 나에게 진실했다면 당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요즘 옷으로 나를 표현하길 즐긴다. 내가 좋아하는 여성스러움, 우아함, 지적이고 싶은 바람까지 모두 옷에 담고 있다. 어울리는 색을 위아래로 배열해 거기에 걸맞은 구두와 가방을 고르는 일은 하나의 놀이처럼 여겨진다.(아름다운 가게에서 웬만한 것들은 거의 다 장만했다) 그 누가 멋들어진 평가를 하지 않아도 내가 생각한 것을 옷으로 표현해 내는 일이 너무나 즐겁다. 튀지 않기를 바라던 어제 입던 옷을 입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묻어난다.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다.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되는 삶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고 싶다. 

세련되지 못해도 유행에 민감하지 못해도 나 다워서 멋지다는 말을 듣고 싶다. 튀기 싫어서 참고 사는 내가 되기보다 내가 좋아서 표현하는 모습들을 환대하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 매번 무난함 속에 나를 가려 그런 내 모습을 좋아한 사람들과 만났다면 이제는 나의 뾰족함과 독특함, 어설프고 촌스런 모습까지도 나다워서 괜찮다며 말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원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으며 새로운 날들을 꿈꾼다. 


참고 맞추며 사랑받길 원하던 어제여 안녕!



부족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도 참 괜찮다는 것을 내 멋대로 코디를 해 나가며 배워가는 요즘, 

어제보다 오늘 나는 살 맛이 난다.



Unsplash의Dr.Sourabh Panari



이전 07화 나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어딜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