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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14. 2023

나를 기르는 시간

꽃천지 블라우스를 입던 날

“니 좀 과하다. 그러니깐 이상한 건 아닌데. 꽃이 그게 뭐꼬. 아름다운 가게에서 산 거제?”


내 귀에 들리는 남편의 번역된 소리는?!


“이상하다. 진짜 완전 심하게 과하다. 어쩜 그런 옷을 입을 수가 있노. 이상한 거 니도 알제?”


실은 이 옷을 고를 때 나도 많이 고민했다. 

목 주변도 레이스에다 가슴 부위도 사선으로 레이스가 달려있다. 옷 전체는 네이비 색인데 꽃무늬는 붉은 계통이었다. 이렇게 설명해도 화려한데 내가 눈으로 봐도 과하게 보이긴 했다. 곤색의 얌전한 니트와 이 블라우스를 놓고 몇 번을 갈아입으며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 아무래도 곤색 니트가 튀지 않아서 이 옷, 저 옷 더 잘 어울리는 거 같긴 한데. 중요한 건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었을 때 내 기분이 달랐다는 것이다. 뭔가 화려해지는 거 같아서 좋았다. 약간의 설레는 기분도 들었다. 기본인 옷들만 입었을 땐 느낄 수 없었던 특별한 감정. 이 옷을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 싶어 들었다 놨다 야단을 쳤었다. 그 마음을 읽었던 것처럼 남편은 내 옷을 보고 입을 댔다. 




매번 그랬다. 아무 소리도 듣기 싫었다. 가만있으면 중간은 갔다. 그러니 옷으로 과감한 시도를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나는 가죽점퍼도 입고 싶고, 오프 숄더 셔츠도 입고 싶었는데 말이다. 고, 눈들이 두려웠다. 내게 뭐라고 한 마디씩 덧 붙일까 싶어서. 


‘수야, 그 옷은 진짜 좀 아니다.’


살아오는 시간들도 그랬다. 

내 욕구를 드러내는 일을 꾹 참는 걸 버릇처럼 했다. 아파도 약속이 있으면 웬만하면 나갔다. 가치가 달라 하고 싶지 않았던 모임도 실망을 끼칠까 오래 참고 섞여 있었다. 엄마들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사이를 망칠까 봐 그 사람의 무례함을 내 웃음으로 덮었다. 나도 선을 넘었을지 모르나 분명 이 말과 행동은 나를 너무 얕잡아 보고 한 말인 거 같은데.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그 시선이 더 중요했다. 그 사이를 질질 끌었다. 만날수록 불편하고 거북할 때도 많았는데. 그리고 상냥하게 웃고 인사했다. 그분은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으니. 내 속에선 불화산이 활활 타오르는데.














자주 덤벙대던 내가 사람 많은 곳에서 한 사람에게 망신을 당했을 때, 정말 비참했다. 교문 앞, 엄마들 사이에 둘러 쌓여 그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정신없음을 탓하며 농담을 던진 날. 그날 내가 너무 바보처럼 여겨졌다. 그 사람이 싫은 것보다 나 자신이 더 미웠다. 덤벙대는 내 모습을 다 뜯어고치고 싶었다. 이 날이 두고두고 기억됐다.


한 모임에서 자꾸만 풀리지 않던 그날의 기억을 입에 올리다 한 분이 물으셨다. 




“정수 씨, 많이 외로웠겠어요. 아무도 편이 되어 주지 않았네요.”


그 말에 없던 정신이 번뜩 들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내가 스스로의 편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단 한 번도 내 편에서 나를 위로하며 살아온 적 없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항상 어떤 일이 생기면 내 탓을 했다. 내가 문제야. 네가 그러면 그렇지.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었던 그날도 나의 행동을 탓했다. 분명 그 시절은 뒤늦게 공부한다 나를 챙길 여력도 없을 때였는데. 이기적이라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내가 원했던 수많은 것들을 뒤로 미루고,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더 이상 나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내 편이 되는 삶을 살았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그 또한 궁금했다. 내 욕구대로 살아서 비난받을 일이 생기는 것을 피하지 말자는 생각도 들었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은 어떤 문제가 있으려나. 그 모습을 제대로 세상에 드러내 본 적 없는데. 그렇게 살면 사람들은 나를 미워하려나.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다 떠나갈까. 나는 정말 볼품없는 인간인 것일까.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던 순간 용기를 냈다. 

그런 다짐 중에 포함된 것이 바로 내 멋대로 옷 입기였다. 수수한 색깔과 무늬 없는 옷들을 나에게 선물했다면 조금 더 내 욕구가 투영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렇게 입으면서도 묻혀서 살아오던 내 기질을 버리지 못해 옷을 입을 때마다 망설인 순간도 많았지만 말이다. 




내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불편한 단톡 방에서 나왔다. 한 사람, 한 사람 우연히 얼굴을 마주치는 건 좋았지만 단톡으로 다 같이 말을 이어 나가는 상황은 불편했다. 말을 함부로 한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그 상황이  왔을 때 그렇게 휘두르는 말은 그만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감정을 숨기고 살 때가 많았는데 힘들면 힘들다 이야기하고, 모임을 이어 나가는 게 벅찰 땐 그만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헤어스타일을 지적하는 사람에겐 내 마음에는 든다고 말했다. (원래는 ‘좀 그렇죠’하고 대답하며 수없이 거울을 보고 다시는 그 머리를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캐묻는 그 사람에게 답하는 게 불편하다고 이야기했다. 

한 번도 그리 말한 적 없어서 이 말들을 입에 올리는 상황을 겪을 때마다 심장이 얼마나 벌렁벌렁 거렸는지 모르겠다. 




우려하던 것처럼 많은 인간관계가 깨지고 허물어졌다. 오해를 살 때도 있었고 때론 그 오해가 진실인 순간도 있었다. 불편한 사이가 늘어날수록 고개를 들고 집 밖을 나서기가 어려웠다. 적 이라곤 거의 없었던 내가 동네에서 인사를 못할 사이들도 생겨났었기 때문이다. 

모든 화살이 내게 날아오는 것 같았으나 순간을 견뎠다. 표현이 미숙해서 상처 줄 일도 많았지만 처음 내 욕구를 말하는 자리에서 매끄러운 말이 비단처럼 쏟아 나오지 않았다. 자라나며 미리 겪어야 했을 일들을 이제야 겪기에 어쩔 수 없이 지나쳐야 할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다. 부딪히는 시간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아프고 어려운 시간들을 제법 오래 보냈다. 













과연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마법처럼 나 다운 사람으로 변해서 할 말도 부드럽게 하며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잠시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주말이면 함께 여행 다닐 엄마친구가 사라졌다. 여러 개 가졌던 모임들도 손에 꼽을 정도다. 평일이면 혼자서 차 마실 날이 많다. 자유롭지만 외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자신 있는 것은 나 다움의 진실함으로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를 저버리고 남에게 맞추면서 누구의 마음에 들게끔 살고 싶은 마음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깊이 있게 사람을 바라보고 신중하게 대하는 태도가 생겼다. 불편한 말을 상대에게 아프게 하는 순간의 나를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미움받기 싫어서 사과를 했다면 이제는 실수했을 때를 가려 진지하게 사과할 수 있게 되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내가 되었다. 인생은 잠시 고독 해졌지만 나는 자유로워졌고 편안 해졌다. 이제는 사람을 대할 때 마냥 움츠려 들지 않는다. 내편이 되어서 힘든 순간 나를 다독이기도 한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제보다 단단한 마음이 되어 꽃천지 블라우스를 입은 나에게 입을 대던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야 있잖아. 나도 과한 거 알거든. 근데 이거 입으면 기분이 너무 좋아져.”


더 이상 내가 입은 옷이 별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이 옷이 참 마음에 들었다. 

어제보다 많이 자란 오늘이라는 생각이 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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