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솔 Sep 24. 2023

2. 희의 시선

    희는 오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몹시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180cm의 장신은 늘 꼿꼿했고, 목소리는 단호하며 우렁찼다. 하루빨리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희의 언니는 결혼을 일찍 했다. 희는 결혼 대신 상경을 택했다. 상경 십 년차가 넘어서야 하민을 만나 결혼하고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 희는 아이들에게 자기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도 딸이 말을 알아듣는 나이가 된 후엔 가끔 과거의 조각이 튀어나오곤 했다. 조각은 진심 한 마디일 때도, 과거의 어떤 순간에 대한 회고일 때도 있었다. 시작은 아마도 '내가 정말 순한 사람이었는데 네 아빠의 부모에게 괴롭힘을 당한 후 독해졌다'는 말이었다.


    희는 하민을 몹시 사랑했다. 하민의 어머니와 자매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을 만큼 사랑했다. 그건 하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희와 하민이 아무리 서로를 사랑해도, 아이들을 낳고 자신들만의 안전한 집을 꾸려도, 크고 작은 폭력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리적 폭력에 한정된 기억은 아녔다. 희가 첫 아이를 낳고 하민의 부모 집에 얹혀살던 시절, 하민의 부모는 손녀의 이름 한번 부르지 않을 만큼 손녀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손녀가 밤에 깨어 울면 하민의 어머니는 희를 깨워 타박했다. '우리 엄마였다면 내가 힘들지 않은지 먼저 살폈을 것이다.' 그즈음 희의 일기에는 이러한 설움이 자주 보였다. 출산 후 몸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냉대와 환멸을 감내하며 희의 정신은 말라갔다. 하민은 늘 희의 편이었지만,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 아기는 희의 편이 아니라 희가 돌보고 지켜야 하는 대상이었다. 희는 최선을 다해 딸을 사랑했으나 희의 상황은 그 사랑을 도와주지 않았다.


    다들 아기가 아빠를 닮았다고 했지만 사실 딸은 하민도 희도 그다지 닮지 않았다. 하민은 약간 처진 긴 눈에 희는 동그랗고 큰 눈이었는데, 딸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있었다. 기본값이 화난 얼굴인 아기는 표정도 별로 없었다. 잘 웃지도, 잘 울지도 않았다. 딸을 본 사람들은 '예쁘다'나 '귀엽다'는 말 대신 '똑똑하게 생겼다'는 말을 했다. 희는 그 말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끔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폐렴에 걸렸던 일이나 모유를 얼마 못 먹인 일 같은 게 마음에 걸렸다. 이 년 뒤 태어난 둘째는 달랐다. 남자아이였지만 딸보다 예쁘장했고, 특히 눈이 희를 똑 닮았다. 잘 웃고 잘 울었다. 병치레도 없어 모유를 끝까지 먹일 수 있었다. 둘째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귀여워 어쩔 줄 몰랐다. 손녀의 이름 한번 제대로 부르지 않던 하민의 부모도 손자에겐 조금 달랐다. 희는 하민의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과 어떤 식으로든 접촉하는 게 싫었지만, 한편으론 안도감이 들었다.


   딸도 자라면서는 표정이 많아졌다. 아기 때 아프며 손이 많이 간 걸 보상이라도 하듯, 말을 하고 걷기 시작한 뒤로는 손이 가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무언가를 조르는 일이 드물었고 내버려 두면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곤 했다. 마치 책을 통해 세상을 흡수하는 것 같았다. 똑똑하게 생겼다던 사람들의 안목이 맞았다고 희는 생각했다. 한 가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게 있다면 거짓말이었다. 딸의 거짓말은 아이들이 흔히 하듯 어른에게 혼날까 봐 뭔가를 숨기는 종류와 달랐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 자체를 즐거워했다. 상대의 기분에 맞춰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연기력은 채 갖추지 못한 딸의 얼굴에 '네 기분에 맞춰 거짓말한다'는 글자가 둥둥 떠다니곤 했다. 그게 공감이 아니라 눈치와 계산의 결과임을 알게 된 건 희의 직감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섬세하고 예민한 희는 딸이 대부분의 상황을 머리로 이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건 큰 문제가 아닐지도, 커가며 자연스레 사회화될 수준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희는 그런 것들이 걱정스러웠다. 적어도 정직함만큼은 뼈에 새기도록 단단히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처음으로 숙제를 숨기고 거짓말 친 날, 희가 매 대신 식칼을 꺼내든 건 그런 이유였다. 겁에 질린 딸을 방에 데리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무릎 꿇고 앉아 식칼을 옆에 놓았다. ‘너를 잘못 가르친 내 탓이니 같이 죽자’고 말할 때 희는 차분했다. 할복을 앞둔 사무라이처럼 비장하기도 했다. 겁에 질린 딸이 크게 울수록 차분해졌다.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아들이 방문을 두드리며 우는 소리가 들려도 흔들리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딸의 뇌리에 충분히 박혔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야 방문을 열고 나갔다. 딸이 다시 거짓말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딸은 주기적으로 일상의 잘못을 적어 둔 종이를 희와 하민에게 제출하곤 했다. 종이에는 그간의 잘못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대부분은 읽고도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사소한 일들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고해 의식이었지만, 희와 하민이 딸 앞에서 그걸 읽고 죄를 사하면 딸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리고 안도가 서렸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희는 칼을 든 자신 앞에서 엉엉 울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딸이 일곱 살일 무렵, 넘어져 우는 딸을 일으켜주지 않고 간 날도 떠올랐다. 그후로 넘어지기가 무섭게 일어나 손과 무릎을 툭툭 털던 딸의 몸짓이 떠올랐다. 무릎에서 피가 줄줄 흘러도 아프지 않다며 웃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딸은 희의 언행을 하나하나 기억한 채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런 과함이 희는 짠했고, 동시에 불편했다. 때로는 자신의 엄격함이나 예민함이 딸을 그렇게 만든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고, 때로는 딸이 지나치게 예민한 성정을 가진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가끔은 정을 주기 힘든 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감상과 별개로 희는 딸을 사랑했다. 희가 하민과 함께 만든 가정에 쏟는 정성과 같은 종류의 애정이었다.


    희의 엄격한 윤리의식과 예민함은 여러 재능과 만나 가족의 색깔을 만들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선을 행하라'는 의미의 가훈을 만든 것도, 솔선수범하기 위해 가장 노력한 것도 희였다. 언제나 그랬듯 희는 치열할 만큼 열심히 살았고, 그건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하는 다재다능함을 집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언제나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었다. 쾌적한 집을 유지했고 가족에겐 늘 깨끗이 빨아 다림질한 옷을 입혔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면서는 속옷과 신발을 직접 빨게 하며 책임감을 기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에는 손수 만든 액자에 가족사진을 걸어 두었다. 아이들에게 ‘행복한 가정상’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매년 가족의 생일과 각종 기념일이면 정성껏 만든 카드에 한 자 한 자 사랑을 담아 편지를 썼다. 가족의 뿌리를 만든 종교 문화에도 희의 지분이 컸다. 결혼 전부터 성당의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희를 따라 하민도 아이들도 신앙을 길렀다. 결혼 후 정착한 동네에서도 교사 활동을 이어갔고, 아이들은 희를 따라 평일에도 미사에 가곤 했다. 부활절에는 함께 달걀을 만들어 성당 사람들과 나누었고, 성탄절에는 가족이 함께 합창 대회에 나가 성가를 불렀다. 새해도, 명절도, 모두 성당에서 맞이했다. 가족의 세례명에 따른 축일을 생일처럼 챙긴 덕에 아이들은 일 년에 두 번씩 생일 선물을 받았다. 더없이 신실하고 화목한 가족이었다. 그 모든 모습에 희의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유방암 판정을 받았을 때 희는 처음으로 신을 원망했다. 그래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신은 인간이 감내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준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퇴원 후 더 열심히 기도했고, 일상을 위해 더 노력했다. 암세포가 깨끗이 제거되었다는 수술 결과를 받았을 땐 감사했다.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성당에 갔다가 산에 올랐다. 수술 후 예전 같지 않은 몸을 챙기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지만, 등산은 어느새 가족의 주말 문화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뒤 암이 재발했을 때 희는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보다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재발한 암은 한 번의 수술로 제거할 수 없었고, 끝을 알 수 없는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그건 꾸준히 거액의 돈이 나간단 의미였다. 첫 번째 수술도 희와 하민에게는 버거운 금액이었다. 희와 하민은 이 버거움을 아이들이 느끼지 않기를 바라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아이들의 일상이 꼭 같을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후부터 아이들은 희와 함께 병원에 갔고, 언제부터인가 늘 부어 있는 희의 팔을 돌아가며 주물렀다. 하민과 아이들이 분담하는 집안일의 양도 점점 늘어 갔다.


    이 모든 변화가 시작일 뿐이라는 걸 희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앞으로 아이들이 분담할 집안일은 더 많아질 테다. 희의 몸은 점점 더 야윌 것이고, 숨길 수 없을 만큼 머리가 빠질 것이다. 일상적 거동도 불편한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희에게는 몸의 아픔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게 어려웠다. 몸의 아픔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답을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했다. 희는 평생을 신실하게 살았지만, 그때만큼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기도한 적은 없었다.


    희의 얼굴을 빼다 박았던 아들은 자랄수록 하민을 닮아갔고, 딸은 희를 닮아갔다. 그러나 바뀐 것은 외모뿐이었다. 희의 손재주는 모조리 아들에게 갔고, 하민의 연구자적 기질은 딸에게 갔다. 성격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여리고 정이 많았으며 응석받이였다. 약을 먹을 때도 주사를 맞을 때도 우는 소리 한번 없던 딸과 달리, 아들은 병원에 갈 때마다 울며 뛰쳐나와 희를 찾았다. 한참을 어르고 달래야 겨우 주사를 맞힐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반찬이 없으면 꼭 밥투정을 했다. 십 대에 들어선 후에도 엄마 옆에 누워있기를 좋아했고, 혼자 잠을 자지 못해 누나 방에서 잤으며, 밤에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가족을 깨워 데려갔다. 손이 많이 가는 아들에게 신경을 훨씬 더 많이 썼는데도 늘 애정을 더 달라하는 건 아들이었다. 그랬던 아이가 자신의 병으로 인해 빠르게 철이 드는 모습을 볼 때면 유독 안쓰러웠다.


    투병 기간과 비례해 희의 마음은 취약해졌다. 사소한 것에도 점점 더 상처를 잘 받았고, 더 쉽게 지쳤다. 희의 투병이 길어질수록 하민이 지는 부담도 큰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픈 게 하민은 아니었다. 건강한 하민은 희의 아픔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더 많이 상처받는 건 희였다. 그리고 상처를 준 하민의 모습을 딸에게서도 볼 때면 종종 참을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하민의 냉정함이나 덤덤함을 닮은 딸을 볼 때 희는 의지하고 싶으면서도 서운했다. 반대로 자신의 예민함이나 섬세한 감성이 딸에게서 나올 때면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확인 받는 기분이었다. 희는 딸이 하민을 닮지 않기 바라면서 닮기를 원했고, 자신을 닮기 바라면서도 닮지 않기를 바랐다. 이 양가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딸에게 전해질 때 대체로 딸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 희는 딸의 마음을 묻지 않았다. 딸의 마음까지 헤아리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독한 약물에 버티며 일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희에게 이 모든 건 지나친 노력이었다.


    일상을 지키기 위한 노력 중 하나는 주말에 함께 놀러 다니는 가족 문화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가족의 놀이 문화가 병으로 망가지지 않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건 희였다. 산책조차 힘들어졌을 때에야 그 문화를 포기해야 함을 받아들였다. 이제부턴 셋이 놀라고 말하며, 희는 내심 남은 가족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지금의 희도 부담 없이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준다면 더없이 좋았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희가 마음 편히 쉬도록 알아서 잘 지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세심함은 가족 중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런 무심함을 느낄 때마다 희는 고독해졌다. 희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보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자매들에게 “너 진짜 독하다”며 혀 차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싸움 끝에 형제자매들과 연을 끊은 후보다 더 고독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희의 집에는 성당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기도했지만 희의 고독을 채워주진 못했다. 그럴 때마다 희를 위로하는 건 신앙이었다. 때로는 혼자 하는 기도로, 때로는 신부에게 고하는 기도로, 희는 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신부는 희가 오래 전부터 죽음을 준비하고 있음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희에게 숨통이 되어주었다. 그럴수록 가족에게 나누는 말은 줄어들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때부터 죽음을 준비하던 희는 마지막 절차에 다다라서야 가족에게도 이를 알렸다. 여느 때처럼 희를 위해 모인 성당 사람들이 안방에 가득한 날이었다. 성당 사람들을 보내지 않은 채, 희는 거실에 있던 딸을 먼저 방으로 불렀다. 그즈음 딸은 일주일째 학교에 가지 않고 있었다. 잘 일어나지도 걷지도 못하는 희 옆에 붙어 몸을 돌려주거나 화장실에 데려가곤 했다. 매일 저녁 희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희가 이제는 떠나도 되겠다고 생각한 데는 이 모든 걸 묵묵히 수행한 딸의 모습이 컸다. 곁에 와 눕는 딸을 끌어안으며 희는 오래도록 준비한 대사를 시작했다. 처음은 이제 그만 엄마를 보내달라는 말이었다. 몇 초쯤, 아니면 몇 분쯤이었을까. 딸은 멀거니 희를 바라만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없냐는 물음엔 눈물과 함께 사랑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 딸은 지독하게 형편없는 배우 같았다. 그 연기에 당황한 건 지켜보던 성당 사람들이었다. 너는 마지막까지 이런 말밖에 못하는 애야. 싸늘한 희의 말에 사람들은 눈치를 보다 서둘러 나갔다. 사람들이 나간 후, 딸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딸은 어려웠다. 묵묵히 자신을 돌보던 모습과 로봇 같은 지금의 모습은 무척 괴리감이 들기도, 같은 결 같기도 했다. 그래서 희는 그냥 준비한 말을 꺼냈다. 네가 본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다 잊어. 엄마가 아팠던 것도 잊어. 우리 가족의 행복했던 모습만 담아서 책으로 내줘. 딸은 그러마 했다. 나중에 아빠가 다른 사람 만나면 축복해 주란 말에도 그러마 했다. 마지막까지 딸의 얼굴에는 마음이 드러나지 않았다. 딸의 마음을 묻는 대신 전한 사랑한다는 말은 희의 진심이었다. 돌아오는 딸의 답도 진심일 거라고 믿었다. 차분한 끝이었다. 다음으로 들어온 아들은 딸과 모든 것에서 반대되었다. 엉엉 울며 가지 말라 떼를 썼다. 주사 맞기 싫다며 희에게 달려와 울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희도 울었다. 떠날 생각을 하면 서운한 딸과 달리 아들은 마냥 눈에 밟혔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엄마가 우리 가족 병 다 가지고 가는 거니까 너흰 아프지 않을 거야. 아빠도 마찬가지야. 똑같은 말도 아들에게는 차분히 전하기 어려웠다. 어쩜 이렇게 다를까, 희는 새삼스레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어느 쪽이 다행인지는 잘 몰랐다.


    그날은 확실히 추웠다. 이제 완전히 겨울이구나, 희는 생각했다. 찬 공기에 죽음이 서려 있었다. 하민이 돌아오기 전이었지만 쏟아지는 잠을 어찌할 수 없었다. 눈을 감을 때쯤 다음 날이 하민의 생일임이 떠올랐다.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면 정말 끔찍한 생일 선물이 되겠네. 너무 작위적이라고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1. 하민의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