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원장 Sep 02. 2024

일의 가치

소확행 

출근길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매일 만나는 어르신이 계신다. “나이 한 살 더 먹으면 밥 한 숟가락 줄이고, 걸음은 한 걸음 더 걷자”라는 마음으로 출퇴근부터 걸어서 하기 시작했다. 걸어서 구백육십 보 정도 되는 출근길에는 사거리 횡단보도가 있다.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어 그 횡단보도에는 노인 인력 센터 어르신들이 초록색 모자와 초록색 조끼를 입고, “ 정지선을 지킵시다정지 STOP, 연수구 노인복지관이라 쓰인 노란 깃발을 들고 등교하는 학생들의 안전한 등교를 돕고 계신다. 추우나 더우나 한 자리에 서서 매일같이 신호에 맞춰 노란 깃발을 올렸다 내렸다 하신다. 아침마다 어린 학생들과 젊은 사람들이 바쁘게 이 횡단보도를 건너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 주신다. 아침부터 흐뭇한 광경이다. 

  

어느 날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수고가 많으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 뒤로 우리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 아는 것은 없다. 그저 아침마다 깃발로 학생들의 등교를 돕고 있는 어르신이고, 매일 아침 바쁘게 어디론가 출근하는 사람이란 정도다. 어느 흐린 날 우산을 들지 않고 출근하며 인사를 드리자 “오늘 오후에 비 예보 있던데 우산을 안 가져가네?” 하신다. 직장에 우산이 있으니 안 가져가도 된다. 말씀드리며 마음 한편이 따뜻해진다. 날씨가 흐린 날은 비 올까 걱정, 추운 날은 춥다 옷 단단히 입어라, 더운 날은 더우니 건강 잘 챙기라 걱정해 주신다.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지지만 서로를 걱정해 주는 관심과 정이 있으니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란 생각으로 아침부터 뿌듯하다.

   

 날이 더워지자 어르신이 보이지 않는다. 여름 방학이라 등교하는 학생이 없으니 어르신도 오지 않으신다. 매일 아침 뵙던 분이 안 보이시니 출근길이 허전하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팔월 말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둘러 출근길에 나섰다. 어르신이 다시 보인다.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우리 방학 동안에는 공원에서 휴지 주웠어, 우리 집 이사도 갔어”하신다. 갑자기 묻지 않은 이야기에 대답이 궁해진다. “어디로요?” 하고 물으니 송도라 대답하신다. 송도면 동춘동과 거리가 꽤 된다. 멀어서 아침마다 어떻게 다니실까 걱정이 된다. 보자마자 방학 동안 다른 곳에서 하신 일과 이사하신 이야기를 해주신다. 어르신께서도 다시 만나 내심 반가우신 모양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 모른다고 그간 알게 모르게 서로의 근황이 궁금한 사이가 되었다. 

   

아침마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하는 이 일이 참으로 재미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를 글로 써 보고 싶다. 들고 계신 깃발을 사진으로 찍어도 되는지 여쭈어보았다. 그러라 허락하신다. 깃발을 펼쳐 핸드폰에 담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신다. 어르신의 하시는 활동이 재미있을 것 같아 기회 되면 글로 써 볼까 한다. 하고 말씀드렸다. 혹시 책이 나오고 어르신의 이야기도 책에 실리면 책 한 권 드릴게요. 농담 반 진담 반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 말끝에 “혹시 강의가요?”하고 물으신다. 글을 쓴다. 하니 혹시 강의라도 다니나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요. 어린이집 다녀요” 하고 대답했다. 매일 아침, 때로는 어린이집에서 사용할 대파를 들고 때로는 기타나 우쿨렐레를 메고,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씩씩하게 가는 곳이 어딘지 그간 궁금했단다. “아하 그렇군요” 하며 웃으신다. 어린이집에 근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휴 애들하고 생활해서 옷도 아이같이 귀엽게 입나 봐요” 하고 말씀하신다. 가끔은 차려입기도 하지만 보통은 편안하게 입으니 귀엽게 보였나 보다.

    

조석으로 날씨가 서늘해졌다. 올해는 유난히도 여름이 덥고 길었지만 이제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는 아침이다. 아침 출근길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우산도 우의도 없이 어르신께서 횡당보도에서 비를 맞으며 깃발을 들고 서 계신다. 걱정이 된다. 비를 맞아 건강이라도 해치실까 봐 얼른 쓰고 가던 우산을 받쳐 드리며 “아니 비가 오는데 왜 우산도 없이 이러고 계세요?” 하니 우산을 들고 깃발을 들기는 불편하고 우의를 입어야 하는데 우의를 입으면 아직은 덥단다. 제법 빗줄기가 굵어진다. 우산을 받쳐 드리며 겉옷 하나를 벗고 우의를 입을 수 있도록 도와 드렸다. 고맙다 연신 인사를 하신다. 나도 나이 들어 한가해지면 이일을 한 번은 해보고 싶다. 아침마다 직장으로 학교로 활기찬 발걸음을 옮기는 젊은이들을 보며 나 또한 활력과 보람을 느낄 것이다. 자라나는 새싹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가치 있는 일이다. 빗속에서 우의를 단단히 입고 노란 깃발을 들고 서 계신 어르신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뿌듯한 마음으로 어린이집을 향해 바쁜 발걸음을 총총히 옮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