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편 예약은 공홈에서 하자
F1을 관심 있게 보기 시작한 지는 한 3년 정도 되었나 보다. 현대와 BMW에서 하는 드라이빙 프로그램들을 차근차근 이수하고 중계해 주는 한국의 레이스 경기들을 슬쩍슬쩍 보다가 (대부분의 국내 F1 입문자들이 그러하듯) 넷플릭스의 본능의 질주를 보기 시작했고 궁금증이 생겨 룰도 찾아보고 선수들도 더 찾아보고 예전 그랑프리 영상들도 찾아보다가 급기야 작년에는 싱가포르에 직관을 다녀왔었다. 싱가포르에 가서 경기를 직접 보고는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리와 공기와 이벤트들이 너무 신났던지라 올해는 시가지 서킷 중 하나인 아제르바이잔 GP(그랑프리) 바쿠 서킷에 직관을 가보기로 했다.
사실 나는 PM/PO로 오래 일했지만 여행은 별 계획을 세우지 않는 성향이다. 좋은 곳이 있으면 눌러앉아 더 있기도 하고 그다지 꼼꼼하게 여행을 계획하는 편은 아니어서, 대부분의 여행이 친구들이 가자고 하거나 반려인인 파워 J 성향의 D가 여행을 계획하고 나는 군말 없이 따른다. 숙소 컨디션과 비행 컨디션, 동선의 효율 등에 대해 민감도가 나보다 높은 D의 계획은 실패하는 법이 없고, 내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그저 체력 정도랄까. 이번 여행도 복잡한 경유 동선과 일정을 대부분 D가 계획하고 나는 조지아에서 묵을 호텔 정도만 예약했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새삼, 이 모든 것을 신경 썼을 D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본다.
아제르바이잔(바쿠)까지는 직항이 없다. 그래서 가장 적합한 경로는 인천에서 두바이를 거쳐 아제르바이잔으로 들어가는 경로인데, 추석 연휴인지라 티켓이 많지 않았고 우리는 '인천-광저우(경유)-두바이(경유)-아제르바이잔(2박)-조지아(1박)-두바이-광저우-인천'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F1을 보는 것이 제1 목표였고 (퀄리파잉과 레이스만 보면 되니까) 조지아는 인접국가이고 바쿠에서 한 시간만 비행기를 타면 된다는 말에 가보기로 했다. 늘 내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보는 걸 좋아하는 D는 '24시간 동안 경유를 포함해 비행기를 타는 경험을 해보렴'이라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연휴 전 금요일에 이른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라, 목요일 퇴근 후 공항 근처 하얏트에서 하루를 묵고 공항으로 출발.
차를 맡겨놓고 (그랜드 하얏트에는 파크 앤 플라이라는 패키지가 있다. 공항 주차장은 예약이 이미 만차이고, 자주 이용하던 BMW 에어포트 서비스도 만석이라 이걸 선택)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서, 인천-광저우-두바이까지 가는 중국남방항공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려고 했는데...
"고객님, 이 항공편은 없는 항공편이고, 광저우에서 스탑오버가 하루인 항공편뿐인데요.."
...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오전 8시 45분, 체크인 마감까지는 30분이 남았고 그 안에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현장 티켓판매는 하지 않으니 고객센터에 통화를 해보라는 조언을 들었지만 9시 이전이라 고객센터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이때 이미, '바쿠를 못 갈 수도 있겠구나, 이 긴 연휴를 집에서 보내야겠구나, 뭐.. 그건 그것 나름대로 ㅠㅠㅠㅠㅠㅠ'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워 J인 나의 반려인은 노트북을 꺼내 1) 광저우 1박 가능한 호텔 예약 창 2)이 항공권을 버리고 갈 경우의 항공편 예약 창 3) 이후 예약된 일정 관련 창을 동시에 띄워놓고 방법을 찾고 있다가 9시가 되자마자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한참 통화를 한 뒤 (아직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광저우를 거쳐가는 항공편 대신 직항으로 두바이에 가는 대한항공 티켓을 얻어냈다. 알고 보니 직항이 없는 컨디션에서 연휴 내 항공편이 잘 없어 예약 대행하는 사이트를 이용했는데 거기서 뭔가 잘못된 모양.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원래 예약했던 중국남방항공을 타고 광저우를 경유하는 비즈니스석 대신, 티켓 그레이드 J인, 풀페이 대한항공 비즈니스석을 타고 경유 없이 두바이로 출발할 수 있었다.
나는 여행을 못 갈까 봐 진심 떨면서 있었는데, 타임어택해서 문제 해결하는 상황이 신났다고 말하는 반려인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따라다니기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