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하늘이 무너지는 듯 빗줄기가 쏟아졌습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던 그날, 저는 문득 한 분을 떠올렸습니다. 남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 탁월하셨던, 공감능력이 남다른 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분과의 인연은 2014년 3월 7일, 제 생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생일날 맺은 인연이라 더 또렷이 기억합니다.
벌써 4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분의 모습은 여전히 제 마음속에 선명합니다.
할아버지는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신 분이었습니다. 품격 있고 단정한 태도는 은퇴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등산을 즐기셨지만 어느 날 하산길에 큰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치셨습니다.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건강은 악화되었고, 결국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장기요양 등급을 신청해 3등급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공단에서 제공한 복지센터 목록 가운데 최우수기관으로 꼽힌 ‘이상한 복지센터’에 전화를 주셨습니다.
“여보세요, 이상한 복지센터입니까?”
“네, 맞습니다.”
“내가 많이 아파서 3등급을 받았는데, 요양보호사를 보내줄 수 있나요?”
“네, 어르신. 주소를 알려주시면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늘 우리를 정성껏 맞아주셨습니다. 언제나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계셨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모습에서 삶에 대한 태도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그분은 남의 마음을 잘 읽으셨습니다. 목소리의 떨림, 얼굴빛의 변화, 작은 한숨까지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
그날도 저를 보시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센터장, 오늘 사무실에서 무슨 일 있었나요? 얼굴이 분노로 가득 차 보이는데…”
저는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아침부터 퇴직금 문제로 요양보호사와 다툰 일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김 00 요양보호사는 입사 7개월쯤 되었을 때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소장님, 아들 등록금 때문에 그런데… 퇴직금을 매달 선불로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퇴직금을 중간정산 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매달 퇴직금을 선불로 지급하기로 했고, 대신 영수증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퇴직을 선언하였고, 인수인계조차 하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45일 만에 다시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센터장님, 퇴직금을 아직도 안 주셨네요. 오늘까지 안 주면 노동부에 신고하겠습니다.”
저는 답했습니다.
“선생님, 매달 선불로 받아가셨잖아요. 영수증도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노동부에 물어보니, 선불로 받은 건 아무 효력이 없답니다. 다시 청구해도 된다고 했어요. 센터장님도 아시잖아요. 근로계약 만료 전에 일시금으로 지급한 퇴직금은 퇴직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에요. 흥~ 왜 이러시나.... 나참 ”
그 순간,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여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져 있는 사이 할아버지가 저를 부르셨습니다. 제 얼굴을 찬찬히 살피시더니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까?”
그 눈빛은 친정아버지처럼 따뜻했습니다.
저는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으며 요양보호사 선생님과 있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 선생님이 매달 퇴직금을 선불로 받아가셨는데, 이제 와서 또 달라고 하십니다. 안 주면 노동부에 신고하겠다고까지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미 받은 걸 또 달라고 한다는 거군요.”
“네, 할아버지.”
잠시 생각하시던 할아버지는 제게 물으셨습니다.
“센터장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싶습니까?”
할아버지의 질문에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억울하다는 마음을 꺼내놓아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센터장, 내가 좋아하는 옛날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보겠습니까?”
그리고 들려주신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옛날에 한 효자가 병든 어머니를 위해 돼지고기를 구해 오다가 산에서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으르렁거리며 고기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센터장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아버지가 중간에 제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호랑이한테 고기를 던져주고 도망가야지요. 고기는 다시 구할 수 있으니까요.”
할아버지는 크게 웃으셨습니다.
“맞아요. 센터장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일은 없겠군요. 고기를 던져주고 다시 구하면 되지요. 열심히 일하면 언제든 얻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효자는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고 무사히 마을로 내려가 더 많은 고기를 얻어 어머니께 드려,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하고 오래 사셨답니다. 자식이 배고프면 어미를 잡아먹듯, 절대 자식을 굶기면 안 됩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저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곱씹었습니다.
‘그래, 이번 일은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일일지도 몰라….’
그날 저는 결국 5년 치 퇴직금을 다시 지급했습니다.
억울했지만, 마음속 울화통은 오히려 조금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이상한 복지센터가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자.”
할아버지의 공감과 지혜는 지금도 제 마음속 등불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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