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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를 찾는 방법

파랑새(나)를 찾으려면 집안(내면)을 살펴보기

by 오월의 나무
패널에 크레파스화


이 장면을 그림책에서 보았을 때, 따뜻한 색감이 좋았다. 자세히 보니 ‘앨리스 지명수배(WANTED)’라는 벽보가 붙어 있었는데, 단어에서 풍겨지는 느낌과는 다르게 귀여운 분위기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공고문은 담벼락에 붙어 있는데 정작 앨리스는 바로 가까이 집안에서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풍경. 그것도 환한 미소와 함께.


앨리스를 찾는 사람은 누구일까? 앨리스를 어디에서 잃어버렸던 것일까? 앨리스는 누군가 자기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혹시 장난으로 앨리스가 붙여 놓은 것은 아닐까? 같은 몇 가지 가벼운 상상을 해 보았다. 상황의 설정도 재미있었지만 주로 사용된 컬러가 따뜻한 계열이라서 그런지 사랑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크레파스화로 표현하기에도 괜찮을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조금 까다로웠다. 비슷한 계열의 색을 표현할 때는 미묘한 차이를 두면서도 전체적인 조화를 고려하여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이 그림 속의 앨리스는 ‘파랑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기에의 작가 마태를링크(Maurice Maeterlinck)가 쓴 어린이를 위한 동화극 ‘파랑새’에 나오는 파랑새. 어릴 때 동화책으로 읽고 TV에서 인형극으로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두 오누이가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파랑새를 찾으려 떠났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그것은 꿈이었고 깨어보니 파랑새는 바로 집 안에 있었다는 이야기. 행복은 늘 집안에 있다는 것, 그러니 멀리에서 행복을 찾기보다 가까이에 있는 행복을 발견하라는 것 같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였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그림 속 앨리스가 마치 파랑새 이야기 속의 파랑새 같아 보였다. 동심을 자극하기도 하고, 문득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찾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상담을 공부하게 되셨어요?’ 묻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럴 땐 주저 없이 답한다. ‘저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요.’라고. 지금은 대학교에도 ‘상담’을 전공할 수 있는 학과가 있고, 학과명에도 ‘상담’이 들어가는 곳이 적지 않지만 내가 처음 상담을 공부할 때만 해도 이 분야의 전문성에 대한 이해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법률 상담, 피부 상담, 부동산 상담처럼 해당 분야에서 궁금한 내용을 묻고 답을 구하는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대학원을 진학해서 공부할 만큼의 전문적인 일인가에 대해서는 제쳐두고라도 상담을 공부한다고 하면 사주풀이나 점을 보는 것으로 오해받는 일이 흔했다.


가끔은 상담을 학문적으로 공부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다른 사람을 바꾸고 싶어서라거나 가까운 사람을 치료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를 당당하게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당시 진로방향도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때였기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감히 다른 사람을 바꿀 생각은커녕 남을 도와주고 싶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상담은 내담자가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그래서 변화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바꾸거나 직접 지인을 치료하려는 것은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담을 공부하겠다고 선택했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어쩌면 그것이 ‘계획된 우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틈만 나면 말씀하셨다.


‘너는 커서 선생님이 돼라. 선생님 되면 얼마나 좋냐. 여자도 직업이 있어야지.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이 최고다. 돈도 많이 벌고, 방학도 있으니 네 시간도 많고.’

남들 앞에서 알은체를 하고 어깨 으쓱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실제로 나는 알고 있는데 남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알려줄 때 뿌듯함도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그리고 있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 별로 거부감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나도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대학 진학 시기가 다가와 현실을 알게 될수록 꿈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졌다. 엄마는 여전히 나의 미래를 교사로 그리고 계신데, 웬만한 사범대는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교육학과가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다닐 때 한참 좋아하던 9시 뉴스 진행 아나운서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교육학과는 사범대 다른 학과에 비해서 입학 점수가 조금 낮았다. 교육학과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지 조차 몰랐지만,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아나운서를 하는 것을 보니 학교에 다니는 동안 혼자 다른 일을 탐색해 볼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정말 선생님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사범대는 진학할 수 있으니 교육학과에 가보자. 엄마의 기대도 충족하고, 여차하면 나는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을 테니.’


그렇게 교육학과에 입학해서 임용고사를 준비했다. 내가 정말 교사가 되고 싶은지 아닌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겨를 없이 학년은 점점 올라가고 관성의 법칙도 아닌 것이 다른 길은 탐색할 생각도 못하고 임용고사를 준비했다.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치른 임용고사는 이전에 보았던 다른 어떤 시험과도 분위기가 달랐다. 시험 보는 중에 이미 떨어질 게 확실하다는 느낌이 그렇게까지 강하게 드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예상대로 보기 좋게 떨어지고 나서는 방황의 시작이었다.


임용고사를 다시 준비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 의사결정을 앞두고 정말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하지만 그때까지는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나에게 물었다.


‘나는 왜 교사가 되려고 했을까?’

‘정말 교사가 되고 싶은가?’

‘왜 교사가 되고 싶은가?’


...같은 질문을.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면 할수록 답을 찾기가 궁색했다.


‘엄마가 되라고 하셔서...’

‘전문직이라 뭔가 그럴싸해 보이니까....’

‘다른 건 생각해 본 게 없어서...’.


어느 것도 내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속 시원한 답은 아니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앞에 놓고 답답함은 커지고, 답답함은 자책으로, 자책은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를 넘어 깊은 우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답을 찾으러 상담을 공부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그 선택 역시 막연한 것이었다. 상담을 공부하는 대학원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알고 싶어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대학원에서 보낸 시간은 모두 ‘나 자신을 알기 위한 과정’으로 수렴된다. 상담 이론 하나를 배울 때마다 나를 대입해 보았고, 인간을 이해하는 관점이 얼마나 다양한지, 각 이론이라는 프레임으로 나를 이렇게 저렇게 들여다보는 재미가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성장배경, 주관적 경험, 생각과 감정의 연결고리, 기질과 성격 등등. 나를 이해하면 할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지는 것 같았다.


상담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내 마음속 거울을 닦아 나 스스로를 잘 비춰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욕구나 기대가 나의 것인 양 착각하지 말고 온전히 내 욕구와 기대를 잘 반영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비추는 나의 거울을 잘 닦아야 한다. 흔히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도 한다. 조용히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려고 했다. 나를 향하는 어떤 소리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잘 구분하려고 했다. 소리가 내 안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밖에서 들려왔던 소리가 녹음되어 재생되는 것은 아닌지도 구분하려고 했다. 그런 과정은 마치 튜닝이 안되어 잡음과 함께 들려오는 소리가 있을 때 정확히 주파수를 맞추는 작업 같았다.


나에 대해서 알기 위해 시작했던 공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분명한 건 이 길에 들어서기로 한 나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조직 내에 불안정한 지위, 기회비용이라는 말이 무색한 낮은 임금, 전문직인지 봉사인지 모호한 사회적 기대 언저리에서 방황한 시간도 많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에 더 큰 책임감으로 더 진지한 자세로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들리는 좌표였지만 계속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앨리스는 멀리 있지 않다. 앨리스는 앨리스의 집에. 나는 내 마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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