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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로하는 방법

나에게 현재를 선물하기

by 오월의 나무
16_나를 위로하는 방법.png 나무 패널에 채색 by 아크릴 물감, 색연필

한참 일이 많을 때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한참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등은 굽어 있고, 목은 빠져 있고, 허리까지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하고 쓴 커피를 들이켜다가 화장실 신호가 와서 몸을 일으키면 굳어 있던 몸 이곳저곳에서 통증이 아우성을 친다. 얼마나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것인지 시계를 보면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나있곤 했다.


바쁘고 고단한 날들 중에 특히 더 힘든 날. 그전부터 꼬박꼬박 기록하던 가계부도 쓰지 않은 지 몇 년짼데, 맡고 있는 일에서는 연간 예산을 집행하고 관리하는 일에 더해 체계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아이디어까지 더해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하던 때. 개인적인 일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테고, 하다가도 진작에 그만두었을 일이지만 공적인 일이기에, 함께하는 작업이기에 꾸역꾸역 해야 할 때. 이날도 그런 날이었다.


나름 엉덩이의 힘으로 공부하던 습관이 남아서 작업을 하다 보면 휴식도 잊은 채 몇 시간을 의자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모니터와 눈 맞추며 작업을 하면서, 내 의지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몸이 알아서 저절로 움직이는 것인지조차 느끼지 못했다. 좋아하는 어떤 일에 깊이 몰입했을 때는 극도의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건만, 정서가 배제된 상태였기 때문인지 그저 멍하기만 했다.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하던 일을 정리하고 카페 화실로 향했다. 지난번처럼 나무 패널들이 보였다. 선인장 모양으로 소품을 만들어 붙인 작업이 재미있었는데 마침 선생님이 만드신 집 모양 마그넷이 눈에 들어왔다. 크기가 작아서 한두 개는 쉽게 만들 수도 있겠고, 선인장보다 모양이 단순해서 많은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단층집 하나를 만들고, 이층 집도 한 채 만들었다. 얇은 나무 판에 모양을 그리고 자른 후 채색했다. 집 두 채를 만들고 나니 몇 개 더 만들어도 될 만큼 자신이 생겼다. 그렇게 한 채 두 채가 금세 여러 채가 되었다. 채색을 하고 사포로 가장자리를 다듬는 시간도 좋았다. 날카로웠던 끝이 부드러워지고 낯선 느낌의 새집이 아니라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정겨운 느낌마저 들었다.


처음에는 마그넷 한두 개를 만들까 했었지만, 막상 여러 채의 집을 모아 놓고 보니 마을을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을이 되어 줄 패널을 채색하고 작은 집들을 하나씩 붙였다. 바탕의 색감도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만들다 보니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색연필로 작은 마을에 나무를 심어주고, 하늘에는 별도 총총 심어주었다. 학교에서 작업을 하며 휴식도 없이 보낸 시간은 근육통과 열등감을 남겼다. 하지만 재활용 쓰레기로도 처리하지 못하는 나무 조각과 보낸 몇 시간은 뿌듯함과 행복으로 충만했다. 게다가 아름다운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내가 만든 이 패널을 감히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패널의 존재 유무로 내 삶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까? 미적으로 그럴듯한 가치가 없어도 괜찮다. 없다해도 아쉬울 것은 없으니까. 그저 이 패널을 만드는 동안의 나는 다른 어느 때보다 그 시간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야말로 몰입했고, 행복했다.


몇 시간을 집중하느라 온몸의 근육통이 있었음에도 비슷한 강도의 집중을 하면서 근육통은커녕 이렇게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다니. 모니터 앞의 작업은 정서가 배제된 기계적인 일이라고 했지만, 아니었다. 보잘것없는 작은 나무 패널과 함께 하면서 알았다. 모니터 앞에서 애써 꾹꾹 눌러 두었던 힘든 마음이 위로받는 느낌이었으니까.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고, 하는 일이 버거운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때가 있다. 울적한 마음이 들지만, 전환을 하기에도 무언가 새로운 힘을 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그런 날, 나는 지친 생각을 내려놓고 무겁고 어두운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시간’을 나 자신에게 선물한 것이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중에 ‘쿵푸팬더’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의 코믹한 캐릭터에 가려져서 쉽게 지나칠 수도 있지만 생각해 볼 만한 명대사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그중 하나가 거북이 대사부가 자신감을 잃은 팬더 포에게 하는 대사이다.


Yesterday is history 어제는 과거이고,

Tomorrow is a mystery 내일은 불확실하며

and Today is a gift. 오늘은 선물이다.

That's why it is called the present. 그래서 오늘(현재)을 선물이라고 한다.


내가 카페 화실에서 보낸 시간은 무언가 생산적인 성과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결과물로 보면, 썩 잘했다고 할 만한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나에게 주어진 ‘현재(present)’에 온전히 집중하였고, 그 시간은 나에게 진짜 ‘선물(present)’ 이 되었다.


모처럼 기분 좋게,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안고 집에 왔다. 하루 종일 쓴 커피 부어가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만사 제쳐 두고 달려간 보람이 있었다. 아무 쓸모없는 것 같은 버려진 나무 판들이 그럴싸한 무언가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참 좋다. 예술이라는 것이 당장 눈앞에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쓸모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기분을 좋게도 하고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하니까. 다음에도 이것과 비슷한 것으로 시리즈를 만들어 볼까 싶다. 남들에게는 쓸모없는 일 같고 시간 낭비 같은 일일지라도 그 일을 할 때 온전히 집중해서 나를 잊을 수 있다면. 그 결과물로 내가 그저 만족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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