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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를 지나는 방법

슬럼프에 머물지 성장과정의 일부로 추억할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생각해보기

by 오월의 나무
17_슬럼프를 지나는 방법.png 지난주에 이은 시리즈, 밝은 배경색을 칠하니 낮이 되었네


그런 날이 있다. 그저 오늘이 어제 같고, 또 그제 같고... 분명히 달력에 날짜는 다른 날이지만 비슷한 날이 이어지는 것 같은 날. 별 다르게 걱정할 일이 없다면 그런 날들은 감사한 날일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무언가 있어야 할 것이 빠진 듯한, 지루하기도 한 그런 느낌. 그림을 그리러 가는 날은 일상에 분주함을 벗어나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누리는 것이기에 분명히 신나는 날이고, 즐거운 시간임에도 점점 무뎌져 갔다. 복잡하고 지친 생각을 접어두고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도 어느새 또 다른 패턴이 된 것이다.




예전에 ‘사랑의 블랙홀’이란 영화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은 빌 머레이라는 배우인데, 날씨 예보관으로 나온다. 2월 2일 성촉절(Ground day) 행사가 열리는 마을에 취재를 가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이다. 성촉절은 마못(marmot)류의 일종인 우드척(Woodchuck; Groundhog)이 깨어나는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24 절기 중에 경칩과 비슷한 것 같았다. 계절의 특정 시기를 겨울잠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는 시기로 이름을 붙인 것도 재치 있고,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비슷한 절기가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은 몹시 냉소적이고 일상에 찌들어 매너리즘에 빠진 인물로 묘사된다. 주인공이 보기에는 무슨 대단한 사건도 아닌데 취재를 하러 멀리 이동하는 것이 귀찮기만 했던 터라 시종일관 투덜대며 일을 마쳤다. 빨리 복귀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아서 서둘렀지만, 주인공의 바람과 달리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 겨울이 채 끝나지 않아 폭설이 내려서 발이 묶인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어제와 같은 날이 반복된다. 어제와 같은 라디오 멘트, 어제 만난 사람, 어제 겪었던 일이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이. 첫날은 다음 일어날 일의 결과를 알고 있으니 제멋대로 장난도 치고, 상황을 이용하여 제 욕심을 채우기도 한다. 그러나 밤에 잠들고 다음날 일어나면 어김없이 같은 날이 반복되니 하루이틀이면 모를까 나중에는 정말 괴로워한다.




결코 영화의 주인공 정도는 아니지만, 나 역시도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즐거움을 찾던 일조차 새로운 자극으로 느끼지 못하고 또 다른 일상이 되어 가는 중이었던 것 같다. 오늘은 가서 무엇을 그릴까. 어떤 방법으로 그려볼까. 작업을 하고 싶을 만큼 끌리는 것이 없어서 조금 막막했다. 바로 시작을 하지 못하고 꾸물대는 모습을 지켜보던 선생님이 말을 건넸다.


‘오늘은 어떤 것을 그리고 싶으세요?’

‘모르겠어요. 별로 내키는 것이 없네요.’

‘아직 못 정하셨으면, 지난번에 하셨던 것 다시 한번 해 보실래요?’

‘똑같은 것으로요?’

‘같은 방식인데 바탕색을 다르게 하면 분위기가 달라지거든요. 이것 한 번 보실래요?’


선생님이 큰 사이즈의 패널을 하나 치우자 그림 하나가 나타났다. 지난번에 나무 피스를 채색해 붙인 작품과 같은 방식의 그림이었다. 나무 패널에 작은 나무 피스를 집 모양으로 만들어 채색해 붙인 방식은 같지만, 바탕색이 밝아지니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지난번에는 바탕색이 짙은 색이라 어두운 밤 같은 느낌이었다면, 바탕색이 밝아서 한낮 같은 느낌으로 대비되어 새로웠다.


‘같은 방식인데, 느낌이 전혀 다르네요.’

‘네. 이렇게 해 보니 또 괜찮더라고요. 한 번 해보실래요?’


딱히 작업하고 싶었던 것이 있지도 않았던지라 주저할 것 없이 시작했다. 작은 나무 피스로 집을 만드는 일은 바로 직전 작품에서 했던 것이기에 어렵지 않았다. 한 채, 두 채, 이번에도 집은 뚝딱뚝딱 완성해 갔다. 색에 대한 감각은 좀처럼 늘지 않아서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타고난 감각이 아니라면, 열심히 보고, 따라 하고 관심을 가지다 보면 향상될 만도 한데, 아무래도 나에게 미적인 감각이나 색감은 향상되는 데에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배색을 해야 어울릴지 적절한 조합이 머릿속으로는 도무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작업을 하는 동안 눈앞에 하고 있는 작업 외에는 불필요한 생각들을 줄일 수 있어서 그것으로 됐다.


집 모양 피스를 완성하고 나서 패널 배경을 채색했다. 따뜻한 느낌이 들면 좋겠다는 생각에 겨자색을 만들었다. 팔레트에서 만든 색은 노란빛이 더 돌았는데, 색을 칠하고 보니 조금 옅은 느낌이었다. 더 밝고 따뜻했으면 좋았을 텐데. 과감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살짝 들었지만 다시 덧칠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탕색이 마른 위로 집을 배치하고 나무를 그려 넣었다. 이른 봄이라 나뭇가지에 이파리는 없지만 그래도 집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니 허전함은 한결 덜했다.


색에 물기가 남아 있을 때는 채도가 높아 보이더니 마를수록 처음보다 가볍고 옅은 느낌이었다. 빛이 풍성한 한낮을 상상하며 작업했는데, 마무리를 하고 보니 그다지 강하지는 않은 듯하다. 5월의 햇살 가득한 오후가 아니라 아직은 새침한 바람이 남아 있는 듯한 4월의 오후 같은 느낌이다. 처음 시작할 때 막막하던 것을 생각하면 두 시간 만에 뚝딱 완성한 것으로 됐다 싶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집에 들고 와서 지난번에 완성한 그림과 나란히 놓아 보았다. 오늘의 완성품만으로는 그냥 됐다 싶었는데, 함께 있으니 한결 좋아 보였다.


‘사랑의 블랙홀’에서 주인공은 처음에는 차갑고 이기적인 인물이었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달라진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있기에 남들을 골탕 먹이고 장난만 치던 인물이 위험 상황을 미리 알고 도와주고는 다정한 사람으로. 급기야 여자주인공 PD와 늘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그녀와 사랑이 이루어진 다음 날,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 매너리즘과 오만이라는 겨울잠에 빠져 있던 주인공이 따뜻한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사람들을 돕고 어울려 지내게 되면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으로 지루한 날들이 이러질 때. 즐겁고 좋았던 것도 패턴의 일부처럼 느껴질 때. 평소 잘하던 일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슬럼프가 아닌가 하고 느껴지는 날. 한 때라도 그 일이 나에게 즐거운 일이었다면, 또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는 대신 최소한 무언가를 남길 수는 있으니까. 하긴, 돌아보면 매일 즐겁기만 했던 날보다 지루해하고, 힘들다고 투덜 대면서도 꾸역꾸역 반복했던 날들이 쌓여 오늘이 있었을 테니.


이 날 작품 자체만으로는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다른 것과 함께 놓이니 달리 보였다. 비슷한 마을 풍경에 밤과 낮의 모습이랄까. 묘하게 조화로워 보였다.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서로를 조금 더 돋보이게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오늘은 어제의 미래이고, 또 내일의 과거가 되는 것처럼 하루하루 이어지는 날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또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어쩌면 기대하는 특별한 날은 평범한 날들이 차곡차곡 쌓인 어느 날이었겠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따분함과 매너리즘 속에 작품을 만들던 이 날 덕분에 글을 쓰는 지금, 특별한 날로 추억할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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