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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을 유지하는 방법

마음과 영혼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기

by 오월의 나무
패널에 채색, 나무 마그넷 부착


식물에 관심이 생긴 것은 독립을 한 이후부터였다.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몰랐는데, 마흔이 다 되어 독립을 하게 되면서 매일 변화 없는 집이 어딘지 허전하게 느껴졌다. 가구는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내가 사용하고 제자리에 두면 살림살이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데서 오는 깔끔함과 편리함이라는 장점이 컸지만 변화 없이 늘 똑같은 모습에서 가끔은 무료함과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 와중에 베란다에 둔 몇 개의 꽃화분은 늘 같은 자리에서도 무언가 움직이고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이사 올 때 엄마가 챙겨주신 알뿌리 화초와 지인들이 집들이 때 사다 준 화분이었는데 며칠에 한 번 물을 주려고 보면 새롭게 줄기가 뻗어나가 있고, 작은 잎이 빼꼼 솟아나 있었다.


엄마는 식물에 애정이 깊으셔서 가꾸는 화분만 수십 개에 이른다. 주말 농장 버금가는 텃밭을 옥상에 만들어 각종 채소를 기르시는 것은 차치하고, 크기와 종류가 다양한 화초들도 하나 같이 풍성하게 잘 가꾸신다. 식물마다 물을 주는 주기가 다르고 세심하게 살피려면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무심한 듯 돌보는 것 같아도 무럭무럭 잘 자란다. 식물을 잘 가꾸는 사람들을 일컬어 서양에서는 그린 썸(green thumb)이라고 부른다는데 엄마는 그런 호칭에 딱 맞는 분이다.


그런 엄마와는 달리 텃밭과 화분에 물 한 번 제대로 준 적 없고, 화초들의 이름조차 관심이 별로 없었다. 텃밭일과 화초 관리하는 것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자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분가 이후, 몇 안 되는 화초에 물을 주며 조금씩 자라나는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들여다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파트 고층이고 남서향이라 볕이 잘 들긴 했지만 빛과 물 밖에 없는 데도 화초는 잘 자랐다. 화분은 몇 개 되지 않지만 화초의 종류가 모두 달라서 잎의 생김새와 빛깔이 서로 달랐다. 초록 색이면 다 같은 색이지 싶었지만 조금씩 달라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하나의 화초라고 할지라도 이전에 나온 잎과 새로 돋아나는 잎의 색깔이 달라서 들여다보고 있어도 좀처럼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즈음 화실 선생님이 만든 소품에 눈길이 갔다. 얇은 나무 패널을 모양대로 잘라서 채색을 하고 뒷면에 자석을 붙이면 마그넷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같은 종류를 여러 개 만들어 조금 더 큰 패널에 붙이니 또 다른 작품이 되었다. 집에 있는 화초를 가꾸려면 때 맞춰 물도 주고 가끔 영양제도 챙겨줘야 하는데 그림으로 만들어 두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오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운 화초 모양은 잘 만들기가 어려울 테니 선생님의 샘플을 따라서 만들기 수월한 선인장을 골랐다. 생각보다 만드는 재미가 쏠쏠해서 하나를 만들고 나니 연이어 몇 개를 더 만들고 싶어졌다. 모두 완성하고 패널에 붙이니 정말로 작은 정원을 만든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볕을 쐬고 물을 주면서 가꾸는 동안 점점 자라나 풍성해지는 맛은 없을 것이다.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 좋아했던 살아 있는 화초들과는 달리 그림 속에 박제가 되었으니 또 하나의 정물이 추가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만드는 동안 들였던 시간과 애정, 감정들이 함께 담겨 있어서인지 볼 때마다 그 느낌이 살아난다. 외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볼 때마다 되살아나는 감정과 생각들이 이 작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 같다.


해마다 3월이면 학교에 입학하는 젊은 청춘들을 만나다 보니 나이 드는 줄도 모르고 살게 된다. 중간고사 전까지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티를 벗지 못한 고등학교 4학년 같은 학생들이 학기를 마칠 때쯤이면 조금 대학생 느낌이 나기 시작한다. 2학년, 3학년 학년이 올라갈수록 후배를 둔 선배 느낌이 나는가 싶으면 어느덧 졸업을 앞둔 의젓한 4학년이 되어 있다. 특히 남학생들은 중간에 군복무까지 마쳐야 하니 신입생 때 느꼈던 풋풋함과 대비되어 단단함이 느껴진다.


학생들이 성장한 만큼 분명히 나의 시간도 흘러갔을 텐데 정작 내 시간이 흐른 흔적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입학했던 학생들이 졸업하고 새로운 학생들이 입학하여 다시 그 자리를 채우는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지니 주위는 변화하는데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의 눈은 바깥을 향하고 있어서 의식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나의 내면을 향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변화하고 있음을 나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변의 무엇인가가 달라지는 것을 보고야 겨우 알아차리니 말이다. 부모님이 점점 나이가 드시고, 조카들의 학년이 달라지고, 오랜만에 물어본 친구의 자녀의 나이에 놀랄 때, 시간이 참 빠르구나를 실감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누군가는 매일 아침 마주 대하던 거울에서 문득 엄마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났음을 느꼈다고 했다. 얼굴에 주름이 많아지고 깊어진 것, 흰머리가 늘고 머리카락이 가늘어져 힘없이 빠지는 것, 볼은 야윈 것 같은데 팔뚝의 살은 점점 늘어지는 데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나의 내면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예전보다 넉넉하고 여유 있어졌나? 아니면 더 옹졸하고 완고해졌나?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가 실패했을 때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것보다 누군가가 성공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고. 시간이 흘러 외면의 물리적인 변화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나는 누군가 자신이 바라던 일을 멋지게 성취했을 때, 그 결과를 시기하지 않고 진심 어린 박수로 축하해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뜻대로 되지 않아 실망한 사람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는 마음도 함께.


상록수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이 주는 믿음직함이 좋다. 하지만 변하지 않으려는 것이 생각의 완고함이나 고집스러운 마음으로 착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상록수조차도 푸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초록잎을 만들며 살아있는 것이니까.


내면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를 향해 깨어 있고 싶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내 안과 밖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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