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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다스리는 방법

감정은 신호일 뿐. 잠시 멈추고 신호의 의미를 나에게 물어보기

by 오월의 나무
19_화를 다스리는 방법.png 나무 패널에 아크릴 물감


카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온전히 휴식이었다. 그래서인지 결과물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모든 작품들에 애정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조금 더 애착이 가는 것이 있다. 이 작품도 그중에 하나이다. 패널 크기는 여느 그림보다 큰 편이지만 두께는 얇아서 실제로 보면 빈약한 느낌이 많이 든다. 마무리할 때 액자처럼 테두리를 하는 게 좋겠다는 선생님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면 훨씬 더 허술하게 남았을 것이다. 이만하면 됐다 하고 작업을 끝내려다가 선생님의 조언을 따라 약간의 수고를 더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액자처럼 틀을 만든다고 뭐가 좀 달라질까요?’

‘뭐 대단한 작품도 아닌데 괜히 손대서 더 괜찮아지지 않으면 어떡하죠?’

‘귀찮은데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들만 했다면 두고두고 아쉬워했거나 지금처럼 만족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 마음이 썩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다. 평소라면 강한 색감에 쉽게 끌리지 않는데 화가 잔뜩 났던 때라 그런지 온통 타는 듯 강렬한 붉은색에 눈길이 갔다. 비록 미신일 뿐이지만 붉은색으로 서명으로 마무리한 것도 여느 때라면 꺼렸을 법한 것이었으니 확실히 달랐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렇게 잔뜩 화가 나서 평소라면 택하지 않았을 강렬한 그림과 붉은색 서명까지 남겼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불같이 타오르던 감정을 잊을 수 있었고, 완성하고서 엄청 뿌듯했던 느낌이 또렷하다.


무엇보다 용광로처럼 타올라서 나 스스로를 불태우거나 다른 사람에게 불티를 옮겨가지 않게 했다니 다행이다.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으니 더욱 만족스럽다.


이 그림을 볼 때면 붉게 타오르는 양귀비가 어떤 감정을 자극한다. 당시에는 불쑥불쑥 올라오는 화(anger)였다면, 지금은 그 감정의 이름이 무엇이든 정체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물론 지금 보면 초록 풀밭도 듬성듬성하고 그저 흰색으로만 처리된 배경이 허전해서 아쉽다. 여백의 미는커녕 마무리가 덜 된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떻든 간에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마음에 불붙던 날이었으니 ‘화’가 온통 나를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중에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작품은 사람의 대표적인 감정 다섯 가지를 캐릭터로 묘사하였는데, ‘화’는 붉은색으로 표현된다. 색깔부터 생김새까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게 ‘화’를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감정에 온도가 있다면 ‘화’에게 붉은색 보다 더 잘 맞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화(火)라는 한자어가 불이라는 뜻을 가진 것처럼 화는 마음에 들지 않고 못마땅할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안에 담고 있으면 열이 나서 몸이 뜨거워지니 밖으로 뿜어내는 경우가 흔한데, 그렇게 되면 화를 받는 사람이 불에 데듯 상처가 남게 된다. 그렇다고 제대로 불을 끄지 않은 채 안에 가지고 있게 되면, 결국 자기를 태우게 된다.


불이 났을 때는 가까운 소화기를 열어 물이나 소화 분말을 이용해 불길을 잡거나 심하면 119를 불러 소방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마음속에 화라는 감정이 일어나면 그 불을 다스리도록 적절한 도구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단순하지만 차가운 물 한 컵을 들이켜는 것, 화가 나는 장소에서 벗어나 시원한 바람을 깊숙이 폐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한 컵의 물이나 잠시 다른 장소로 몸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화를 엉뚱한 곳이나 사람에게 옮기는 것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심한 경우는 화에 데이지 않을 방법을 익힌 전문가를 만나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는 열 에너지로 바꿀 수도 있을 테고.


나 역시 화가 났을 때 이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마음속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던지 불길이 일어난 이유마저 까맣게 잊을 수 있었다. 더구나 그 불 같은 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꽃으로 변하여 남았으니 얼마나 멋진 변신인가. 일시적이었다 해도 확실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모든 감정은 일종의 신호(signal) 일뿐, 특별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기쁨, 분노, 슬픔, 우울, 불안 등등 이름마다 조금씩 다른 의미를 담고 있어 다른 상태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신호등의 다른 색깔이 다른 정보를 상징하는 것이지 가치의 차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흔히 긍정적 감정, 부정적 감정 이런 표현으로 범주를 나누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런 구분은 편의상의 분류일 뿐 강도나 지속시간 등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특정 감정이라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피하기만 할 필요가 없고 마냥 따르거나 반가워만 할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 내 마음속에서 어떤 신호가 오는지, 어디서 온 것인지, 이유가 무엇 일지를 찬찬히 살피는 정도로 활용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화는 마음속의 불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에너지이다. 에너지는 무엇인가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고. 그렇게 보면 그 힘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 힘을 누가, 어느 방향으로, 어떤 강도로,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화를 에너지로 생각한다면, 그 에너지를 잘 이해하고 다스려서 나에게 정말 필요한 곳에 잘 쓸 수 있도록 관리해야 할 것이다.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왜 참을 수 없는지를 생각하기보다 이 에너지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뜨거운 불에 델까 봐 무턱대고 다른 사람에게 쏟아 내기보다 불을 잘 담을 수 있는 단단한 그릇이 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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