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필요한 도움은 무엇인지 스스로 먼저 해보기
2년 동안 카페 화실에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해도 200 시간에 한참 미치지 못할 것이다. 주 1회 2시간씩이었지만, 매주 빠짐없이 꼬박 출석한 것도 아닌 데다가 화실 밖에서는 그 흔한 선 그리기도 연습하지 않았으니까. ‘마이너스의 손’은 여전했지만 눈높이는 달라졌는지 이번에는 무엇을 그릴까 고르는 과정은 숙련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이제 겨우 몇 작품 완성해 놓고 그림의 ‘숙련도’라는 표현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온당치 않지만, 몇 가지 기법과 요령을 알게 되면서 눈길이 가는 그림의 수준이 점점 높아져 갔다.
연필 쥐는 것조차 어색했을 때는 가장 단순한 것, 누가 그려도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샘플들에 눈길이 갔다. 물론 늘 예상과는 달라서 과정이 단순해 보였던 것은 단순하지 않았고,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아 보였던 것도 완성한 결과물에서는 차이가 많이 났다. 남이 해 놓은 것을 보는 것과 내가 실제로 해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쉬워 보이던 것도 막상 해 보면 어렵고, 간단해 보이는 것은 그저 보이는 것일 뿐,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처음 선 그리기에서 시작한 그림은 이후에 크레파스화, 아크릴화, 수채화 기법 순으로 이어졌다. 각 기법을 활용해서 연달아 두 개의 작품을 완성하고 난 다음에는 앞서 배웠던 방법 중에서 내가 원하는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각 기법 별로 특징이 있고, 매력이 있었지만 나는 크레파스 기법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림 기법에 온도가 있다면, 내겐 크레파스화가 제일 따뜻했고, 조금 실수를 해도 만회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처음보다는 숙련도가 조금 더 생겼다고 느꼈을 무렵, 이전보다 어려워 보이는 그림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릴 만한 모델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그림책을 뒤적이다가 이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배경은 밤이지만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고, 아이와 할아버지가 마주 보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하지만 보기에 좋은 것과 그릴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였다. 과연 내게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이 모습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영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이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조금 더 쉽게 그릴 수 있는 것을 찾으려 책장을 뒤적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시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까 한참 보시던데... 그거 그리시려는 것 아니었어요?’
‘아, 보셨어요? 그림은 마음에 드는데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요.’
‘왜요. 그냥 해 보세요.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보기엔 정말 좋은데 이렇게 잘할 자신이 없어요.’
‘아니에요. 한 번 해 보세요. 힘드시면 제가 나중에 도와드릴게요.’
선생님의 ‘..... 제가 도와 드릴게요.’가 귀에 꽂히는 순간, 나는 주저 없이 도전하기로 했다. ‘힘드시면’이라는 조건과 ‘나중에’라는 제한이 있었지만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선생님이 도와준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용기를 얻어 시작된 작업. 하지만 역시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자꾸만 눈길이 가던 그림에 대한 애정은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 점점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면 그릴수록 어렵게 느껴지고 시작할 때의 의욕은 사라져 갔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을 사용하지 않고 밝기와 분위기를 살리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기대만큼 작업 속도나 진도가 나가지 않아 시간도 오래 걸렸다. 하던 작업을 중단했다가 다음 주에 이어서 하려니까 계속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아쉬운 대로 마무리를 하려다 한 주를 더 하기로 작정하고 두 시간을 더 쏟아붓고 나서야 겨우 끝마칠 수 있었다.
완성 1주 전, 그림의 채색까지는 마친 상태였다. 서둘러 마무리를 하려 했다면 바로 신너 칠을 하고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처음에 워낙 이 장면에 끌렸던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아서 1주 더 시간을 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전까지 작업하는 동안에 선생님께서는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시고 채색하는 요령 등을 말씀해 주시긴 했다.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던 때 ‘제가 도와드릴게요’라는 말씀에서 내가 기대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주. 채색까지 모두 끝냈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공을 들여보자 생각하고서는 내가 먼저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선생님, 여기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여기는 너무 밝고, 여기는 너무 어두워요.’
‘네. 짙은 색을 먼저 너무 많이 쓰셔서 그런 것 같아요. 이렇게 한 번 해보세요.’
‘선생님, 여기는 너무 평면적이지 않나요?’
‘이 부분은 한 가지 색깔로 보이지만 색을 섞어서 쓴 거예요. 이렇게요.’
하시면서 몇 가지 시범을 보이면서 작업을 도와주셨다. 그리고는,
‘지금은 더 하시면 뭉개지니까 조금 있다가 살짝만 덧칠해 보세요.’
그전까지 내가 그릴 때는 가끔 한두 마디 정도만 덧붙이시더니 구체적으로 의견을 말하고 질문하니 기다렸다는 듯 해법을 알려주셨다. 왜 진작 도와주시지 않으셨을까 싶을 만큼 내가 필요했던 곳에 꼭 맞는 방법으로 직접 시범까지 보이시면서. 선생님의 가벼운 터치 만으로도 그림의 질이 달라지는 것에 신이 나서 알려주신 대로 조금씩 디테일한 작업들을 해 나갔다. 결과물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 정도도 괜찮다 싶었다.
‘선생님, 이렇게 하면 된 건가요? 이제 거의 끝내도 되겠죠?’
‘네. 좋네요. 그런데 여기는 연필로 한 번 해 보세요. 그러면 훨씬 나을 거예요. 아, 그리고 여기 하늘에 별은 이것으로 표현해 보세요.’
라고 역시 시범과 함께 손길을 더해주셨다. 정말 선생님의 말씀대로 연필로 묘사를 더하니 샘플 속 그림의 느낌과 점점 비슷해졌다. 하늘에도 별이 총총하게 빛나는 것으로 바뀌니 내 마음도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알았다. 선생님의 ‘제가 도와드릴게요.’라는 말씀에는 ‘힘드시면’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힘이 드는지 아닌지 내가 말하기 전에 상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 힘들어 보인다면, 그것은 보는 사람 입장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럴 때 도움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다른 문제이다. 설령 경험상 누군가가 힘들어 ‘보여서’ 도와주려 해도 상대방은 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정말 도움이 필요했다면 도움을 청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하나 더. 선생님의 말씀에 ‘나중에’라는 전제도 있었다. 힘들면 도와주겠지만 그 시기는 ‘처음부터’가 아니라 ‘나중에’였다. 만약 선생님이 처음부터 도움을 주셨다면, 나는 작업하는 내내 계속 선생님께 의존했을지 모른다. 선생님의 반응을 살피고 더 기대하는 마음도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주에 도움을 청했을 때는 혼자서 대부분의 작업을 해 놓은 상태였으니 그때의 도움은 일종의 플러스알파(+α)로 작용했다.
내가 의존해서 작업을 한 것이 아니니 스스로 해냈다는 자신감을 해치지 않았고,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인 질문을 하니 디테일한 기법도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적절한 도움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어서 그림의 완성도까지 높일 수 있었다. 지난주 서둘러 끝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한 번 해볼까 싶지만, 선뜻 자신이 없었던 처음에 ‘도와주겠다’는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가 힘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도움은 꼭 필요할 때 내가 먼저 청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면, 먼저 혼자 힘으로 해 보아야 한다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도록 믿고 기다려 준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