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관한 질문은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하기
책을 좋아한다. 읽는 것도 좋지만 내 것으로 소유하는 것으로 책만 한 즐거움을 주는 것도 드물다. 내가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자유를 얻고 난 이후 가장 아끼지 않은 소비 분야라고 하면 도서구입일 것이다. 빌리지 않고 구입한 책에서 좋아하는 문장을 만나 마음껏 밑줄 긋고 메모할 때, 읽던 페이지 한쪽 모서리를 마음대로 접어도 되는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정말 기뻤다. 지금도 책을 구입하면 책윗면에 이름을 쓰고, 표지 안쪽에도 구입날짜와 메모를 적는데 그때의 즐거움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닥치는 대로 구입을 했던 것은 아니다. 장식용이나 소유 자체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구입하면 반드시 읽는다거나, 언젠가는 읽어야 한다는 나름의 엄격한 기준이 있었다. 가끔 예전에는 빌려 읽었지만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서라거나, 언젠간 읽어야지 하고 호기롭게 주문하는 육중한 책들도 섞여 있기는 하지만. 최대한 구입한 책은 한 문장이라도 읽는 것이 스스로가 정해 놓은 규칙이다.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생각하다가 떠오른 기억이다. 어릴 때는 ‘세계문학전집’, ‘세계위인전집’, 심지어 ‘세계의 가정요리전집’ 같은 책을 집집마다 팔러 다니는 분들이 있었다. 양장본으로 고급스럽게 제본된 책은 책꽂이에 꽂아만 두어도 교양 수준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 세일즈 포인트였던 것 같다. 나는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싶다고 했지만, 엄마는 위인전집을 사주셨다. 위인전을 읽으면 ‘위대한 사람’이 될 거라 믿으셨는지 ‘책 많이 읽고 훌륭한 사람 돼라’는 말씀도 하셨던 것 같다. 활자에 대한 매력과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적정 수준에서 사주신 위인전을 읽기는 했지만 그리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유치원에 다니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글자를 읽게 된 후로 부모님의 기대가 컸다. 소리 내어 책을 읽을 때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부모님의 미소가 나는 좋았다. 아마 그게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된 첫 번째 이유였을 것 같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정보를 알게 되니 내가 읽은 내용으로 알은체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책 읽기를 좋아했던 이유였다. 또래 친구들에게 잘난 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니 도서관에 가는 것도 좋았다. 대학에 다닐 때 제일 아끼는 장소 중에 하나도 교내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은 책을 공유하는 곳이지만 소유 같은 느낌을 주었다. 서가 가득 꽂혀 있는 책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과정도 재밌어서 도서관이 놀이터 같았다. 책을 대여하려면 먼저 도서관 한쪽 벽에 자리한 책서랍들에서 책카드를 찾아야 했다. 책 카드에는 책 이름과 고유번호, 비치장소가 쓰여 있었다. 번호를 찾아들고 개가식 도서관을 누빌 때 정말 행복했다. 책장들 틈에서 귀퉁이가 누런 먼지 낀 책을 찾아들었을 때는 마치 기품 있는 골동품을 보는 느낌도 들었다.
또 책을 빌리면 맨 뒷면에는 도서대출 카드라는 게 있었다. 누가 언제 책을 빌렸고, 반납예정일은 언제인지가 적혀 있었다. 내가 책을 빌리면서 써넣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나보다 앞서 같은 책을 빌린 사람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알지도 못하지만 같은 책을 빌린 사람이니만큼 알 수 없는 친밀감 같은 걸 느끼며 만나면 잘 통할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런 이유로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마지막 장면이 내겐 잊지 못할 명장면이 되기도 했고.
한참 지나고 나서 든 생각인데, 대학교 다닐 때 도서관에 자주 갔던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허영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 또래보다 먼저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잘난 척하려는 마음의 확장판이랄까. 제2의 교복세대였던 나는 대학생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존슨즈 베이비 로션을 바르고, 단발머리에 후드티, 청바지 차림을 벗어나지 못한 고등학생 같았다.
하지만 화려한 옷차림과 메이크업, 긴 머리에 굽 높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멋쟁이 동기들로 즐비한 학과 분위기가 너무 낯설었다. 어쩐지 모두 나와는 다른 부류 같고 어울리면 말 한마디 편하게 섞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 지레 거리를 두었다. 물론 다른 한쪽에는 공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아르바이트에 쏟아야 하거나 세상 고민을 모두 짊어진 듯 어깨가 쳐진 친구들도 있었다. 한쪽은 눈부신 봄과 뜨거운 여름이라면, 한쪽은 깊은 우수의 가을과 고독한 겨울 같은 느낌이랄까. 원래는 따뜻한 봄을 좋아했지만, 어느새 서늘한 기운에 조금씩 젖어들어 있었다.
봄 같은, 혹은 여름 같은 친구들이 풍기는 상큼함과 발랄함은 왠지 가벼워 보였다. 가뜩이나 선배들은 X세대라서 분위기가 다르다며 시기인지 비난인지 모를 어조로 동기들을 평가하곤 했다. 나 역시 밝은 친구들의 자유분방함이 버거웠다. 그렇다고 우수나 고독을 느낄 만큼 생각이 깊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어느 부류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 같은 느낌, 짙은 안개에 덮여서 나도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막막함 같은 느낌 속에 살았다.
그럴 때마다 도서관에 가곤 했다. 나도 내 마음을 알지 못하겠는 답답함을 풀고 싶다는 생각에서 여러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특히 법정스님과 박완서 님의 글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법정 스님의 글은 읽을수록 마음이 평안해지고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 사춘기도 없이 무미 건조하게 지냈던 때와 달리 대학생활은 막막함과 두려움과 대상 모를 분노가 가득했다. 그때마다 나를 위로해 주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스님의 글이었다. 박완서 님의 글에서도 많은 힘을 얻었다. 박완서 님이 묘사하는 작품 속 인물들에서는 강하지만 고집스럽지 않았고, 소박한 듯 세련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당당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태도, 지지적이면서도 냉철한 시선이 담겨 있어서 멋있었다.
두 분의 글은 진짜 어른으로서 들려주는 말씀이었다. 마음이 지쳐 위로가 필요할 때, 나조차도 내 모습을 알지 못해서 흔들릴 때 내가 가야 할 방향, 갖추어야 할 태도를 알려주셨다. 두 분께 진 빚이 많은데 갚을 길이 없다. 심지어 법정스님은 입적하실 때 속세의 글빚을 지고 가시겠다고 출간을 금지한다는 유언까지 하실 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한 분이셨다. 이제는 그분의 새로운 글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도서관에서 그런 좋은 글들을 읽었음에도 나는 두 분의 글에서 느꼈던 태도나 깨달음을 실천하지는 못했다. 화사한 봄날 같은 친구들을 보며 느꼈던 시기심의 크기만큼 그 친구들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아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은 발랄함. 그래서 다른 것으로 만회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마 그것이 책이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도서관 모든 책들을 섭렵하거나 탐독으로 무장할 정도의 수준도 못 되었다. 오히려 심한 불균형의 편독에 가깝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기심과 열등감은 책을 읽을수록 수그러들었다. 교만함일 수도 있고 불필요한 우월감일 수도 있는 감정들로 상쇄했던 것 같다.
화려한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이 보였던 물질적 허영심 같은 것을 나는 정신적 허영심으로 채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다른 부류일 거라 미리 선을 긋고, 앞서 짐작하고 판단하며 곁을 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경험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그 친구들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먼저였다. 낯선 것을 두려워하고 물러섰던 것은 친구들이 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나의 협소하고 옹졸한 마음이 보인 전형적인 투사였음을 깨닫고 한참 부끄러웠다.
물리적으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그때의 풋풋함과 자유분방함을 누리지 않은 것이 아쉽기는 하다. 그나마 허영심인줄도 모르고 마음의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읽었던 책들이 지금의 나의 온기를 유지하는 불쏘시개가 된 것만큼은 다행이고 감사하다. 그때의 불쏘시개가 없었다면 자칫 염세와 냉담으로 세상과 사람에 대한 마음이 식어버렸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도서관에서, 책에서 나침반을 찾았다. 누군가에겐 지금의 유튜브가, 노래나 춤이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중요한 건 혼자가 아니라는 것. 찾고자 한다면 길이 보일 거라는 것. 다만 어디로 가야 할지 묻는 것은 나의 몫이라는 것. 어디로 가야 할지 질문에 따라, 길을 볼 수 있고 어떻게 가야 할지 물을 때 방법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릴 때는 기분이 좋았다. 전체적으로 색감이 밝고 환해서 그랬던 것 같다. 주로 사용했던 말끔한 표면의 MDF가 아니라 옹이까지 있는 거친 나무판이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은근히 세부 묘사가 많고 색깔도 다양해서 손이 꽤 많이 갔다. 정성껏 작업하지 않은 것이 곳곳에 눈에 띄는 작품이지만, 지난 시간 속 책과 도서관에 얽힌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 기분 좋은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