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크기를 줄이고, 익숙한 것에서 작은 것 한 가지를 바꾸어보기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어릴 때 참 많이 들었던 질문 중에 하나이다. 내가 커서 뭐가 되고 싶냐니. 자라면 무엇인가가 되어야 하나? 흠... 그렇다면...착한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는 의리 있는 제비가 되어야 하나? 동화 속에 사이좋은 오누이가 죽어서 오빠는 햇님이 되었으니 동생인 나는 달님이 되어야 하나?
그런데 내가 뭔가 되고 싶다고 하면 될 수는 있는 건가? 정말 글자 그대로 질문 속에 ‘뭐가 되고 싶냐?’는 것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지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구체적인 직업을 제한하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질문의 의도를 알아채기도 전에
‘여자가 선생님이면 최고지.’
라며 내가 해야 할 답을 미리 대변하는 분들이 주위에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나는 선생님이 되어야 하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게 되고, ‘선생님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 누군가 같은 질문을 하면 스스로 ‘저는 선생님이 될래요.’처럼 마치 나의 의지로 그런 결심을 한 것처럼 말하거나 ‘저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처럼 욕구마저 내 것인 양 답하게 되었다.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주로 듣기를 바랐던 어른들의 답 중에는 ‘대통령’이라든가 ‘과학자’, ‘의사’ 등이 인기가 많았다. 그러다가 기대했던 답에서 어긋나기라도 하면 ‘남자가 꿈이 커야지, 그렇게 쩨쩨해서 어디다 쓰냐?’ 라거나 ‘적어도 00은 된다고 해야지.’라며 핀잔을 주거나 듣는 사람 마음에 드는 답으로 바꿔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답은 여자라는 고정관념과 사회적인 기대에 부응한 것이었지만 당시엔 핀잔을 듣거나 면박을 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던 것 같다.
나 역시 꿈은 크게 꾸어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고,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대통령이나 과학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 줄도 잘 알지 못하면서 그런 일들을 하겠다고 답하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은 실제 된 것처럼 좋아하고 안심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대통령이나 과학자에 비해서 선생님은 소박한(?) 답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대통령이나 과학자를 만나본 적 없었던 나로서는 학교에 들어가고부터 선생님은 매일 만나는 분이었기 때문에 마음먹으면 정말 될 수도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런 질문은 누가, 언제부터, 왜 하게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되고 싶은 사람이란 것이 누군가를 도와주는 사람,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어쩌다가 구체적인 직업의 이름을 말하는 질문으로 왜곡되었을까?
이 작품은 초여름 저녁에 했던 작업의 결과물이다. 평소와 달리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를 1시간 여 동안 완성하였다. 아무리 아크릴 물감으로 하는 작업이 다른 기법에 비해 빨리 작업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하지만 두 시간 동안 두 개를 완성하다니. 게다가 판넬 속 집과 화분은 화면 가득한 크기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밀'이 있다. 판넬의 사이즈가 기존에 작업했던 작품들의 평균 사이즈의 1/4에도 미치지 않는 작은 크기라는 점이다. 가로 세로 어느 쪽도 한 뼘이 채 되지 않는, CD 케이스보다도 작은 그야말로 소품이었다. 바탕을 무슨 색깔로 칠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 정도만 잠시 생각했을 뿐 만들어야 할 물감의 양도 적었고, 칠하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탕에 물감을 칠하고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만으로 작업의 절반 이상을 한 셈이 되었다.
집 모양의 그림은 사인펜처럼 생긴 아크릴펜으로 그렸다. 물감으로 새로 색을 만들고, 크레파스를 덧칠하는 수고조차 없어도 되는 것이었다. 밑그림도 없이 쓱싹쓱싹 선을 그리고 약간의 면을 메우는 것 정도로 충분히 느낌을 살릴 수 있었다. 이렇게 쉽게 뚝딱 무언가 완성이 되다니. 너무나 뜻밖에 빨리 작업을 끝내고 나니 아쉽기도 하고 예상치 않았던 재미가 있어서 하나를 더 만든 것이 화분 모양이 들어간 판넬이다.
이날은 카페화실에서도 여느 날과 조금 다른 분위기에서 작업을 한 기억이 있다. 같은 시간대에 그림을 그리러 온 분들이 하나 같이 기분이 울적하다고 했다. 나도 하루 종일 머리가 무겁고 몸도 찌뿌둥한 것이 뭔가 개운하지 않았었다. 마침 선생님도 아침부터 우울하다는 지인들의 이야기 들어주느라 피곤하다시며 한마디 보태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맥주 한잔 어떠냐고 물으셨다. 보통 때는 그림 작업하는 동안에 커피나 간단한 차를 준비해 주셨기에 이날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간절히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반색했다. 카페에서는 맥주를 팔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직접 인근 편의점에서 가셔서 맥주 네 캔을 사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긴급 성사된 맥주 교습. 맥주 캔 따는 소리는 조금 과장하면 ‘폭죽’ 같았다. 가득했던 탄산이 쾌재를 부르며 터져 나오듯 답답했던 마음이 뻥 하고 뚫렸다. 밖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외친 ‘야호’는 메아리 되어 요동쳤다. 정작 그림 그린 건 1시간도 채 못되지만 빵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맥주까지 한 잔 하니 배도 마음도 부른 충만한 시간이었다. 행복했다.
그림의 크기는 평소보다 작았다. 판넬 속 그림도 다채롭거나 특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작은 조각 가득 들어찬 집도, 씩씩한 화초도 내 손으로 만들어 갖게 되니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큰 사이즈의 작품을 만든다고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뚝딱 하나를 완성하면서 여유를 갖게 되니, 예상보다 만족스러워 하나를 더 해보자는 의욕까지 생겼다.
익숙한 대로, 정해진 대로 가는 길은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새로울 것은 별로 없다. 커피 대신 맥주로 음료 종류를 바꾼 것뿐인데도 기분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작은 것, 단순한 것이었지만 진부한 내 생활을 얼마나 다르게 바꿀 수 있는지. 그것을 경험한 것으로도 이날 밤은 값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