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다 배움이 되는 자유여행
발달장애 학생들과 함께 한 십여 년은 매해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해마다 다른 아이들을 만나고, 학생들의 특성에 따라 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진짜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부족했던 것들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와 도전을 해왔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계산 속에 호기롭게 시작한 해외 자유여행이고, 두 달여 시간 동안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마침내 출발일이 되자 설렘과 긴장, 기대와 불안으로 마음이 들썩거렸다.
여행 1일 차 오전 7시, 인천공항
단체이다 보니 2시간 30분 정도 여유를 두고 집결을 공지했고 하나둘 들뜬 낯으로 모여들었다. 멀리 대전에서 혼자 공항버스를 타고 온 아이도 있었다. 새벽같이 준비하느라 피곤한 여정이었을 텐데 여행의 설렘과 홀로 공항까지 왔다는 뿌듯함으로 신나기만 한 모습이었다.
공항에 모이자마자 우리의 공부는 또 시작되었다. 첫 관문은 셀프 체크인. 요즘은 대부분의 항공사가 모바일이나 셀프 체크인을 요구하고,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려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고 공지한다.
덕분에 지난해 제주도 여행을 갈 때는 전교생 백여 명의 체크인을 키오스크로 하느라 애를 먹었다. 심지어 키오스크는 한 예약번호로 9명씩 밖에 체크인이 되지 않아서 예약번호를 9명씩 나누어진 걸로 바꿔 발급받고 한 그룹씩 체크인을 해야 했다.
당시에는 갑작스럽게 추진된 데다 단체여행이어서 여력이 부족했지만 이번엔 자유여행을 위해 열심히 준비해 왔기에 셀프 체크인도 각자 도전해 보도록 했다.
일정을 계획하고 입국수속을 연습하며 수없이 되새긴 덕분인지 대부분 목적지와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항공편까지 달달 외우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한 명씩 설명해 주며 하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렸으나 큰 어려움 없이 체크인을 완료하고, 수하물을 부쳤다.
“혹시 수하물에 보조배터리 같은 거 있으신가요?“
“여기, 가방에 갖고 있어요!“
공지사항으로도, 구두로도 여러 번 당부한 덕분인지 캐리어를 다시 여는 일 없이 수하물 위탁이 끝났다.
학생들에게 준비물을 공지할 때는 혼자서도 챙길 수 있을 만큼 상세하게 안내한다. 보조가방에 넣어야 할 것과 부치는 짐에 넣어야 할 것을 나누고, 여벌 옷의 숫자와 빨래를 넣을 봉지까지 일일이 공지사항에 써준다. 애당초 짐을 잘 꾸려와야 정리도, 자기관리도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4박 5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무선 고데기를 수하물에 넣는 바람에 짐 검사를 하느라 비행편이 줄줄이 지연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준비물을 제대로 공지하지 않은 학교를 탓하는 댓글도, 부모가 챙겼어야 한다고 말하는 댓글도 있었다.
나는 콕 집어 누군가의 잘잘못을 논하기보다는, 현대 사회는 정보가 너무나도 방대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안내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내반입만 되는 품목, 위탁수하물만 되는 품목, 둘 다 안 되는 품목. 또 어떤 나라는 되고 어떤 나라는 안 되는 품목.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으면 수하물로 부칠 수 없다는 건 누군가에겐 상식이지만 누군가에겐 아닐 수 있으며, 내 소지품 중 어느 것이 내장 배터리이고 아닌지도 헷갈릴 수 있다.
한 번 습득한 지식을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는 너무 빠르게 변화한다. 수없이 많은 정보가 밀려들고, 어제와 내일의 지식이 달라지는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고 발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특히나 남보다 더딘 속도로 나아가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여행을 준비하며 한결 스마트해진 세상을 만날 때마다 나는, 아무런 도움 없이 낯선 세상과 마주해야 할 누군가를 떠올린다. 그리고 나의 편리가 누군가에겐 불편을 넘어서 불이익이 되는 것을 종종 목도한다.
탑승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려면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는 것도 그랬고, 공항에서 로밍을 하는 것도 그랬다.
우리는 길을 잃거나 교사와 떨어지는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학생들 모두에게 연락이 가능한 휴대폰을 준비하도록 안내했다.
해외에서 휴대폰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해외여행을 할 때 eSIM을 선호한다.
로밍보다 유심이 대체로 저렴하지만 현지에서 유심칩을 교체하고 귀국해서 또 교체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번호가 바뀌어 한국에서 오는 전화나 메시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불편함이 있다.
eSIM은 유심만큼 저렴하면서 심을 넣다 뺐다 하지 않아도 되고, 기존 심으로 오는 연락도 다 확인할 수 있어서 매우 편리하다. 하지만 사용 가능한 휴대폰 기종이 제한적이고, 설정 방법이 처음에는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어 학생들에게 일괄 적용하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학생들은 대부분 쉽게 할 수 있는 통신사 로밍을 해왔고, 그중 한 명이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해 인천공항에서 신청을 했다. 그런데 로밍 대기인원이 무려 43명이었다! 어플로 하면 5분이면 충분한 것을, 한참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 로밍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이 새삼 충격적이었다.
정보에서 소외되면 더 많은 돈과 더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나도 어느 분야에선가는 미처 몰라서 손해 보고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고, 발달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들은 더욱더 그럴 것이다.
우리 사회가 빠르기에만 급급하여 너무 많은 약자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도, 당신도, 그 어디에선가, 또 언젠가는 약자가 될 수 있다.
긴 기다림 끝에 마지막 한 명까지 로밍을 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우려했던 항공기 지연이나 수하물 분실 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무사히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QR을 준비한 입국신고와 세관신고도 당황하지 않고 통과했다.
그러나 항공권 예약 문제로 부득이하게 두 팀으로 나뉘어 비행기를 탔는데, 무탈하게 통과한 우리 팀과 달리 다른 팀은 일부 학생들이 QR코드가 잘 인식이 안 되고, 입력한 정보가 틀려 다시 수기로 신고서를 작성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모두 수속을 통과해 오사카에 도착했다.
여행 1일 차 오후 12시, 간사이공항
우리가 준비해 온 트래블월렛 카드는 이온 ATM에서 수수료 없이 출금이 가능했는데, 간사이공항에서 수하물을 찾는 곳 바로 앞에 ATM 기기가 있었다. 첫 화면에서 International Card 버튼만 누르면 한국어로 기기 사용이 가능해서 한국 ATM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비밀번호를 잊은 아이들이 있었으나 미리 메모장에 기록하고, 비밀번호 변경 방법도 숙지해 온 덕분에 한두 번의 실패 끝에 모두 10,000엔씩 출금을 할 수 있었다. 카드 위주로 사용하고, 부족하면 또 출금을 할 계획이었다.
번거로워도 ATM 기기를 사용하고, 입출금, 계좌, 잔액 등 용어를 아는 것 역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는 필요한 교육이다.
평소 학교 생활 중에는 경험하기 어려운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그 또한 자유여행의 이유였다.
인천에서 오사카까지는 두 시간의 짧은 비행이었지만 입국수속과 환전까지 하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간사이공항 푸드코트에서의 첫 식사는 그야말로 폭풍 같았다.
우리나라의 푸드코트는 여러 가게의 주문을 한곳에서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간사이공항의 푸드코트는 제각각 가게에 가서 주문을 해야 했다. 북적북적한 인파를 뚫고 제각각 입맛이 다른 아이들의 희망에 따라 이쪽저쪽 흩어지고, 자리도 빈 곳을 찾아 두세 명씩 모여 앉아야 했다. 짐을 지키랴, 주문과 계산을 도우랴, 자리 잡는 걸 확인하랴… 정신이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도 공항에서의 일과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오사카 교통카드인 이코카 카드를 구입해야 했다. 관광지 입장권도 포함된 주유패스를 구입할까도 고민했으나 아이들이 원하는 관광지가 별로 없었고, 정해진 기간에만 이용할 수 있는 점이 불편해 그냥 이코카 카드를 구입하기로 했다.
처음 구입할 땐 카드 가격 500엔을 포함해 현금 2,000엔이 필요하다는 사전 정보를 알고 갔기에 딱 2,000엔씩 들고 공항 2층에서 한 명씩 이코카 카드를 구입했다. 판매 창구가 여러 개여서 예상보다 쉽고 빠르게 구매를 끝냈다.
“이 카드는 지하철을 탈 때 쓰는 거고, 우리는 수요일과 목요일에 사용할 거니까 그때까지 잃어버리지 않게 지갑에 잘 넣어놔.”
산만하고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아이들은 소지품을 분실하는 일도 잦다. 자리에 앉을 때면 옷과 가방 정리,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소지품 챙기고 주변 정리, 평소에도 숨 쉬듯 하는 잔소리지만 행여 여행지에서 분실하면 몹시 골치 아프기에 각별하게 당부했다.
단정한 외모, 깔끔한 옷차림, 정돈된 주변 등은 사소한 것 같아도 대인관계나 직장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노력해도 한계가 있는 다른 기능과 달리 자기관리나 정리정돈은 매일 같이 반복해서 습관화하면 우리 아이들도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당부했음에도, 분실로 인한 문제는 곧장 발생했으니.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리무진 버스를 타기로 하고, 티켓도 한국에서 미리 구입해 왔다. 가격은 지하철보다 비싸지만 걸음이 불편한 아이들도 있어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것보다는 리무진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마침 숙소 근처에 리무진 정류장도 있었다.
24명의 대그룹이라 한 대에 못 탈까 봐 걱정이 되었으나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아 한 번에 탈 수 있었다. 문제는 일본의 리무진 버스가 상당히 아날로그식이라는 점이었다. 종이 티켓에 탑승할 때 펀치를 뚫어주고 내릴 때 그 티켓을 회수하는, 응답하라 드라마 같은 곳에서나 봤음직한 방식이었다.
평소 분실이 잦은 몇몇 아이들은 승차 후 바로 가방에 넣도록 하고 확인을 했으나 비좁은 버스 안인지라 모든 아이들을 확인하지는 않았는데, 막상 내릴 때가 되니 한 녀석이 티켓이 없단다. 짐 가방을 내리는 내내 가방과 주머니를 싹싹 뒤져도 티켓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미 티켓을 확인받고 승차를 했으니 하차할 때 없는 건 크게 상관없을 거라고, 우리나라의 사고방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한 탓일지도 모른다. 전부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하는 뒤늦은 후회가 스쳤다.
열심히 티켓을 찾았지만 없다는 것을 기사에게 어필했으나 기사는 친절한 낯으로 끈질기게 티켓을 요구했다. 결국 스미마셍을 연발하며 아무래도 티켓은 버스 안에 흘린 것 같다는, 기사가 이해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양해를 한참 구한 끝에 리무진은 잃어버린 티켓과 함께 떠나갔다.
여행 1일 차 오후 4시, 덴포잔
겨우 하차를 하고 트리플 앱을 열어 숙소로 가는 길을 찾았다. 미리 입력해 놓은 장소를 누르면 구글지도와 연결이 되는 게 트리플 앱의 좋은 점이다.
“거기 아니야! 여기로 가야 해.”
“이쪽이야!”
연습의 성과인지 아이들은 자신 있게 앞장섰다. 그리고 머지않아 성공적으로 숙소에 도착했다.
그렇게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장장 9시간 만에, 우리는 오사카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여행의 절반은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놀랍게도 이제 고작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