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과 전신 거울만 달랑 들고 이사를 왔다. 오랫동안 내 방을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옷장을 비웠다. 어려서부터 써 온 낡은 옷장은 틈만 나면 서랍이 고장 났다. 이사 전에 옷을 많이 정리했기 때문에 그렇게 크고 무거운 옷장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
텅 빈 방. 옷을 걸 공간이 따로 없어서 고민 끝에 작은 조립식 행거를 하나 샀다. 작은 행거는 가끔 자리를 이동한다. 창가 쪽에 두었다가 방 안쪽에 두었다가 기분에 내키는 대로. 그러면 공간의 느낌이 달라지곤 한다. 가벼우니 옮기기도 쉽다. 방 안을 차지하는 옷장이 없으니 청소도 쉽다. 더 이상 옷장 위와 바닥 밑에 쌓이는 먼지란 없다. 옷걸이에 스타킹을 끼워 바닥 틈새를 닦지 않아도 된다.
처음엔 옷에 쌓이는 먼지가 걱정되어서 옷 커버를 따로 구매할까도 고민했으나, 없이 지내다 보니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옷에 쌓이는 먼지는 가끔씩 털어 주면 그만이다. 코트를 사면서 따라왔던 커버 안에 옷걸이에 걸어야 하는 옷들을 한데 넣어 보관하고 있다. 초반엔 보기 좋게 셔츠를 색깔별로 정리하여 행거에 걸어두기도 했지만 이제는 입는 옷만 몇 벌 꺼내어 둔다.
개어서 보관할 수 있는 옷들은 이사 올 때 들고 왔던 수납함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뚜껑이 있는 리빙박스. 이 수납함은 2개인데 하나는 옷, 하나는 가방이 들어 있다. 가방도 하나만 남기고 모두 처분할 생각이라 정리가 된다면 1개는 완전히 비워질 듯싶다. 안 입는 옷들을 정리하고 수건도 1~2장으로 추려내고 나면 남은 리빙박스 하나도 절반 가까이 줄어들 것 같다.
매일 꺼내 쓰는 수건은 항상 맨 위에. 일부러 하지 않아도 거의 매일 손빨래를 하다 보니 자동적으로 맨 위에 놓이게 된다. 리빙박스에 들어 있는 옷들은 계절에 따라 위아래 위치만 조정될 뿐, 봄맞이, 여름맞이, 가을맞이, 겨울맞이... 그렇게 옷을 정리하는 일은 없다. 가끔 입지 않는 옷을 추려내는 일만 있다. 예전에 비해 옷이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입지 않는 옷이 많다. ‘입는 옷만 입게 된다’는 법칙은 여전하다.
수납함 위에는 잠옷을 개어 둔다. 자주 쓰는 충전기나 이어폰을 올려 두는 등 다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이 리빙박스는 가끔 탁자로 변신하는데 추운 겨울 이불 속에 앉아 여기에 책을 올려놓고 본다. 내 맘대로 좌식 테이블 완성!
속옷과 양말은 작은 수납함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예전에 샀던 것을 그대로 쓰고 있는데 지금은 많이 비워진 상태. 두 번째 칸을 모두 비우고 세 번째 칸으로 전부 옮겼다. 양말은 너무 많아서 몇 년은 살 일이 없는 데다 속옷도 2~3개만 있으면 되므로 갈수록 보관할 것이 줄어들고 있다.
칸칸이 가지런히 보기 좋게 정리된 것도 좋지만, 한 칸을 비우면서 이것도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납을 위한 수납공간'은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보관함도 유용하게 쓰다가 나중에 나눔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다음 이사를 갈 때는 아마 리빙박스 하나만 들고 가지 않을까? 그 속에 모든 옷이 들어 있을 것 같은 그림이 머릿속에 선연히 그려진다.
없이 살기 2. 옷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