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만 먹고 살아도 냉장고 없이 살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엿본 건 자연식물식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다. 그리고 올해 들어 텅 빈 냉장고를 마주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충분히 냉장고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현재 가족들과 생활 중이며 김치냉장고 한 칸을 혼자 독점하고 있는데, 본의 아니게 넓은 공간을 놀려먹고 있는 터라 세입자는 방을 빼기로 했다.
밥과 반찬은 바로 해 먹는다. 마시는 건 물 하나, 찬물도 마시지 않으니 냉장 보관해야 할 음료가 없다. 찬 음식도 먹지 않는다. 냉동 기능이 필요 없다는 건 이미 아이스크림 없이 살기, 냉동식품 없이 살기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최근에는 냉장고가 텅 비워져 있었기에 지난 동향을 살펴보자. 2년간 냉장고에 보관했던 것들이다. 쌀, 과일, 채소, 간장,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김, 생들깨, 콩물, 떡. 그리고 가끔 밥이나 반찬을 보관했다. 이것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콩물과 떡은 드물게 찾아오는 손님이다. 한여름을 제외하고 과일은 실온에 두고 먹고 채소도 실온에 보관하는 경우가 많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안 먹은 지도 꽤 되었고 최근 두 달 동안은 요리하는 데 소금과 고춧가루만 사용했다. 쌀, 고춧가루, 김, 장류도 상온 보관이 가능하니 문제가 없어 보인다.
먹을 만큼만 장을 보는 게 중요하다. ‘먹을 만큼만 산다’ ‘냉장고를 비우고 장을 본다’는 장보기 원칙을 지키니 냉장고가 채워졌다가도 금방 비워진다. 상해서 버리는 음식도 없어졌다. 기한 내 다 먹지 못할 것 같은 채소가 있다면 소금에 절이거나 건조를 해서 보관하면 된다.
참고로 자연식물식을 한다고 다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먹는 음식의 종류가 갈수록 줄어들어서 그렇다. 매일 같은 음식을 한 달 내도록 맛있게 먹는 인간이라서 그렇다. 더 많은 요리를 하게 되거나 먹는 음식이 달라져서 냉장고가 꼭 필요해진다면 누구보다 요긴하게 사용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리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현재의 조건에 맞는 생활을 찾아갈 뿐이다. 나는 지금 냉장고가 없어도 괜찮다.
냉장고는 가정의 생활을 반영한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생활만이 아니라 마음 상태까지 보여준다. 요리를 안 하고 밖에서 밥을 사 먹는 사람은 냉장고의 코드를 뽑고 산다. 냉장고에 좋아하는 술과 음료만 가득 채워 놓고 사는 사람도 있다. 냉동식품과 인스턴트, 편의점 음식, 배달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도 있다. 요리를 좋아하거나 집밥을 선호하는 사람은 직접 만든 음식을 소분해서 냉장고에 채워 둔다. 냉장고를 종류별로 구비한 가정도 있다. 냉장고에 상한 음식을 그대로 방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깨끗하고 잘 정돈된 냉장고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 나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걸 포기하고 억지로 냉장고를 비울 필요는 없다. 다만 낭비되는 음식이 있거나 불편한 점이 있다면 조정이 필요하고 생활에 맞는 방식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채워야 하는 건 뱃속과 마음이지 냉장고가 아니다. 꽉 들어찬 냉장고 앞에서 먹을 게 없다고 기웃거리고 있다면, 냉장고에서 계속해서 상한 음식이 나온다면 식습관을 점검해 볼 때다.
생존을 위해 음식은 필수다. 나는 여전히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은 없다. 꼭 먹어야 할 음식이 없어지자 냉장고에 습관처럼 채워 넣던 음식들도 사라졌다. 음식을 버리는 일도 없어졌다. 먹는 음식이 단순해지고 맛에 관대해지자 냉장고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다. 이제는 냉장고의 전원이 꺼져도, 냉장고가 고장이 나더라도, 냉장고가 없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금 더 자유로워졌고 가벼워졌다. 필수 가전으로 인식하지 못할 만큼 집에 있는 게 당연했던 물건이 없어도 괜찮을 거라니, 별일이다.
없이 살기 91. 냉장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