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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Jun 04. 2023

폼 클렌저 없이 살기


수년간 폼 클렌저 하나로 얼굴과 몸을 씻는 나름의 올인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폼 클렌저마저 비웠다.


평소에 손을 자주 씻는데 피부도 약하다. 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얼굴, 몸, 전신의 피부가 민감하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손에 습진이 생긴 이후로 비누를 쓰지 않았다. 못 썼다는 표현이 맞다. 세정력이 강한 제품으로 손을 씻으면 곧바로 피부에 붉은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그래서 일반 비누, 바디워시 대신 약산성 폼 클렌저를 사용했다. 한 제품에 정착하여 꽤 오랜 시간 안정감을 되찾은 듯했다. 계속해서 나오는 플라스틱 쓰레기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한편에 간직하고서. 그리고 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주방 세제도 비누로 바꾸었고 몇 번 맨손으로 설거지도 하면서 비누에 대한 경계심도 느슨해졌다. 이제는 이 안정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내적인 망설임을 외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비누 하나로 씻기'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피부가 약하고 민감한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씻고 바르는 화장품을 아무거나 쓰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피부에 맞는 화장품이란 좋은 것보다 최대한 피부에 자극이 덜한 제품이다. 그것을 찾기란 많은 시행착오 끝에 발견할 수 있는 보물과도 같다. 그렇게 얻은 정착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꽤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했다. 용기가 필요했다. 많은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원하는 결과를 쟁취할 용기 말이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다시금 그 과정을 되풀이할 수 있는 강한 동기가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기후 위기와 환경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받은 충격과 자기반성은 자연스레 일상생활의 행동으로 옮겨졌다. 미니멀리즘을 접하고 단순한 삶을 지향하고 있던 나는 씻는 일에서도 더 가벼워지고 싶었다. 단순히 미니멀리즘을 넘어 지속가능한 방식을 찾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더 넓고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일은 나아가 사회와 환경에도 좋다'는 사실이었다. 직접 경험하고 체감한 이 선순환을 믿고 이것을 동력으로 삼아 이제는 행동에도 주저함을 버려야 할 때. 내가 만들어 내는 플라스틱 쓰레기에 대한 죄책감도 비울 차례였다.


사실 이런 거창한 이유도 동기도 없고, 그동안 생각만 하던 일을 미루다 여기까지 온 건지도 모른다. 그저 이끌리듯이. 그냥 한 번 부딪혀 보자 싶었다. 세상에 나한테 맞는 비누 하나쯤은 있겠지. 비누 하나로만 씻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나라고 못할 게 있을까? 피부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금방 회복되리라. 몸이 가진 자정 능력을 믿고 한 번 싸워 보기로 했다. 뭐가 이렇게 결연할까 싶겠지만. 혹자에겐 별일이 아닌 일도 누군가에겐 어려운 도전이 될 수 있다. 매번 계절마다 찾아오는 피부 알레르기로 고통받아 온 시간과 독한 피부과 약을 먹으면서 반복된 악순환들. 그 속에서 더욱 소극적이고 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다르다. 그 틀을 부수고 나오니 새롭고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온라인에는 미니멀라이프,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올인원 비누 후기가 넘쳐 났다. 내가 비누를 고르는 기준은 약산성과 무향 제품일 것. 추려진 후보는 3개였다. 처음에 고른 비누는 성분도 괜찮았고 제품을 생산한 기업의 운영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가격 면에서는 합리적이지 않았다. 비누 한 장에 거의 만 원. 비누가 이렇게 비쌀 필요가 있나? 의문이 들었다. 해로운 성분을 빼고 그만큼 성분이 덜 들어갔는데, 좋은 성분으로 채우려면 원가가 더 들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생산 공정에서 더 큰 비용이 발생하는 건지 궁금했다. 당장 쓸 세안제가 없는데도 적절한 비누를 찾지 못했다. 아, 비누 하나 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오랜만에 겪는 쇼핑의 피로감이었다. 단 하나의 비누를 찾는 일도 녹록지 않았다. 다행히 저렴한 가격의 괜찮은 비누를 찾았고, 몇 달이 지나 두 번째 비누에 정착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처음에 비누로 얼굴을 씻었더니 너무 건조했다. 그래서 물로만 세안을 하기 시작했다. 세안은 폼 클렌저에서 비누로 바꾸는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물 세안으로 넘어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물 세안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은 손, 발, 머리를 제외하고 물로만 씻는다. 애초에 절약이 목적은 아니었지만 덩달아 지출도 대폭 줄었다. 씻는 비용이 한 달에 천 원이면 되는 생활. 각종 용품을 쟁여 둘 필요도 없다. 배출되는 쓰레기는 작은 종이 상자 하나. 이렇게 가벼울 수가!




어렵게만 생각했던 일, 두려운 일에 도전했다. 막상 부딪혀 보니 생각만큼 힘들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는 일이란 늘 어렵다. 용기라는 것은 큰일 앞에서만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일에도 용기는 샘솟는다. 작은 마음이 쌓이고 쌓여 단단해짐을 느낀다. '참 별거 아니잖아?' 하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없이 살기 23. 폼클렌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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