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소나기가 그친 뒤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보며 저 끝까지 달려가 본 적이 있나? 보물 상자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그 눈부신 색채의 끝자락은, 다가갈수록 교묘하게 뒤로 물러나 결국 허공으로 흩어지고 만다.
어른이 된 지금, 무지개를 만지러 쫓아가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어른이 되어 쫓는 '완벽한 행복' 역시 그 무지개와 참 많이 닮아있다.
현대인들은 행복을 일종의 '결승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지금의 고통과 불안은 이 결승점에 도달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통행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번 승진만 하면, 그때부터는 정말 걱정 없이 행복할 거야."
"아이들이 대학만 가면, 내 인생에도 봄날이 오겠지."
"노후 자금 10억만 모으면, 모든 불안이 사라질 거야."
하지만 막상 그 결승점에 테이프를 끊고 들어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잠깐의 만족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오는 것은 '완벽한 평온'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허무와 새로운 불안이다. 40평 아파트에 들어가면 취득세와 관리비 걱정이 시작되고, 아이가 대학에 가면 취업 걱정이 머리를 들이민다. 행복을 '나중에'로 미루는 순간, 우리는 평생 신기루를 쫓는 갈증 난 방랑자로 살 수밖에 없다.
행복은 불안이 삭제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행복은 내가 가진 불안을 어떻게 다루고, 그 긴장감 속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느냐에 따라 '따라오는 산물'에 가깝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을 떠올려 보라. 아무 걱정 없이 침대에 누워 빈둥대던 때였나? 아니면 무언가 잘 안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땀 흘리고 몰입하던 때였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적당한 불안이 주는 긴장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20여 년 전, 네비게에션도 없던 시절, 미국에 사는 동생을 만나기 위해 미국 LA에 가서 랜트카를 빌려 샌디에이고 동생 집까지 주소와 지도 하나에 의지해서 찾아간 적이 있다. 사실 즐길 여유도 없는 불안한 미국에서의 초행길이었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을 추억이다.
낯선 외국 도시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길을 잃을까 봐 불안해한다. 하지만 그 불안 때문에 지도에 집중하고, 주변 풍경을 예민하게 관찰하며, 현지인에게 말을 거는 용기를 냅다. 동생 집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느끼는 안도감과 성취감은 그 '불안했던 과정'이 없었다면 결코 맛볼 수 없는 행복이다.
"오늘 국 간이 안 맞으면 어쩌지?", "식구들이 맛있게 먹어줄까?"라는 사소한 불안은 정성을 들이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가족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평온은, 사실 주방에서의 분주한 불안을 통과한 뒤에 주어지는 선물과 같다.
행복은 신기루처럼 저 멀리 있는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불안이라는 거친 파도를 타고 넘는 서퍼의 균형 감각에 더 가깝다. 거센 파도는 보기만 해도 긴장감이 들고 마음에 불안감을 가져온다. 하지만 파도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서퍼는 평생 파도를 탈 수 없다. 파도가 올 것을 알고, 그 파도가 나를 밀어 올려줄 것임을 믿으며 보드 위에 올라서는 순간, 비로소 서핑의 즐거움이 시작된다.
살아 있는 동안 불안을 피할 수는 없다. 따라가기엔 너무 버거운 현대 사회는 오늘까지의 내 능력과 경험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불안까지 더해진다. 이러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무지개를 잡으려 달리는 속도가 아니다. 천천히 걸으며 주변의 풍경을 음미하며, 오늘 나를 찾아온 적당한 불안과 함께 기분 좋게 산책하는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