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Fascko speaking, your family in Hungary."
"Is everything OK there?"
"We are so surprised to hear a news from Korea."
12월 4일 밤 11시경, 보이스톡을 통해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다. 헝가리 근무 당시 같이 일했던 동료이자 친구인 파스코(Fascko)다. 최근 여러 일들로 종종 연락을 하고 있었기에 굳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보이스 톡을 할 이유가 없었지만, 12월 3일 밤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연락을 하였다. 한국 시간대를 알고 있고 밤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지 않는 사려 깊은 사람인데 이렇게 전화를 한 것은 무척, 진심 어린 걱정을 했고 놀란 가슴 가라앉히고 안전 확인도 할 겸 연락을 취했던 것일테다.
파스코와 그의 가족들과는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마음으로 교감을 하고 있고, 한국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보내 올 정도이니, 이번 사건은 이들의 가슴을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족 한 명 한 명에 대한 안부도 물었고 사회 상황이 안전 한지도 물었다. 한밤에 다녀도 문제가 없고, 떨어진 지갑이 있어도 주워 가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알고 있기에 안전에 대한 그의 질문은 자못 신중했다. 아울러 혹여 더 이상의 나쁜 사태가 안 일어나길 바란다는 걱정 어린 마음 표현도 진중했다.
헝가리에서도 긴 시간 동안 한국 관련 얘기가 계속 전해지고 있었다 한다. 뉴스를 통해 전달된 내용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의견들이었으나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헝가리로서는 무척 안타까운 심정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한다. 얘기를 듣다 보니, 음식, 음악, 예술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역에서 한국에 대한 선호가 분명하고, 공식적인 국가간의 수교 전부터 이미 형성된, 기업의 진출로 현지 사회에 미친 긍정적 영향으로 인한 우호적인 시선이 있었기에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헝가리 인들의 마음이 어떨지는 가늠이 되었다.
모든 것이 통제하에 있고 차분히 상황을 수습하고 있음과 한국은 여전히 안전하고 역동적인 나라이며 곧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얘기를 하면서도 마음은 왠지 개운하지 못하고 불편함이 있었다. ‘혹여 더 이상의 나쁜 사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럴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명료히 얘기는 했지만, 현 상황이 단 시간에 정리될 것 같지가 않아서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더구나 파스코는 곧 한국에 방문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현 상황에 대해 나의 마음은 불편했지만 그래도 안전과 일상에 대해 우려할 정도는 아니기에 한국 방문에 대한 우려를 줄이려 장황하게 얘기를 하였으나 보이스톡 말미에 이번 한국 방문 계획을 늦춰야겠다고 얘기를 꺼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퇴행성 무릎 관절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새로이 개발된 약품으로 시술을 받을 계획이었다. 시술 효과는 한국에서 검증이 되었기에 무릎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정상 걸음을 할 수 있다는 간절함으로 이번 한국 방문을 무척 기다렸다. 하나, 이 간절함도 안전에 대한 우려를 넘지 못한 셈이 되었다. 결국 그도, 나도 안타까운 마음만 나누어 갖게 되었다.
그 동안 내가 근무하였던 나라 터키에서, 카자흐스탄에서, 조지아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연락이 왔다. 이들이 전해오는 한국 상황에 대한 내용은 조금씩 다르나, 한결같이 우려의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을 전달해 주었다. 동료, 벗이 있기에 이들은 더 관심을 가졌고, 그래도 따뜻한 시각으로 이해하려고 했고, IMF와 금융위기 때에 보여준 저력에 대한 스토리도 알기에 독려를 해주었다. 이들과 통화하면서 그간의 해외 생활에서 맺어온 관계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되었고 친구 이상의 따뜻한 마음을 확인하게 되어 흐뭇한 감정도 생겼다. 허나 우려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나의 안타까운 마음과 교차되었다.
지금 이 순간, 쌓여가는 것은 안타까움 뿐이다. 나 스스로의 자각 속에서도, 해외에 있는 친분 들과의 전화 속에서도 안타까움만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안타까움 들이기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그냥 안타까움으로 받아들이려니 당혹스럽기도 하다. "Are you OK?"라는 그들의 물음에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듯 대답을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현실과 파스코의 간절함도 누르는 안타까운 상황이 답답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나를 걱정해 주는 해외 친분들이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싶지만, 당분간 안타까움에 잠식되어 숨이막힐 듯 하다.
해외 친분들을 빌어 얘기를 했지만 진정 힘든 안타까움이 쌓여간다. 쌓인 것은 녹거나 무너지거나 사라지겠지만 그 흔적이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안타까움의 기인은 불안이다. 불안은 아마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속 어떤 장면때문일테고...그 장면은 내가 기억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잊을 수 없는 무언가로 남을 수도 있을 듯 하다. 그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는 대신 더 깊숙이 자리 잡을 듯 하다. 안타까움과 불안은 나를 덮고 있지만, 언젠가 이 모든 감정들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이 순간을 외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