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딸의 졸업식을 보면서
* 이 글은 해외에서 아이 교육을 시키면서 교육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느낀 바를 담았습니다.
20여 년 해외에서 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딸아이 둘을 모두 해외에서 키우게 됐다. 첫째는 독일, 이태리, 캐나다 등에서, 둘째는 독일, 이태리, 캐나다, 모스크바 등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다.
오늘은 둘째의 모스크바의 인터내셔널 학교인 브리티시 스쿨의 고교 졸업식. 한국, 일본, 말레이시아, 중국,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에서 온 학생들이 함께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 혹은 중고등학교 6년 과정의 마무리를 축하하는 날이다. Olivia, Sua, Alexey, Chen, Chloe, Kate, Ming... 딸은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함께 우아한 짙은 드레스를 입고 길게 웨이브를 준 헤어스타일로 등장해 나를 놀라게 했다.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라 숙녀가 된 듯했다.
이쁘게 화장한 얼굴로 친구들과 환하게 웃다가 살짝 눈물을 짓다가 소녀에서 여인으로 넘어가는 18살의 아이들의 천 가지 만 가지 표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이 이리도 적절한지 그날 아이들은 순간순간들을 맑고 환하게 빛냈다.
나는 그 아이들이 마치 한집에서 자란 형제, 자매처럼 느껴진다. 그 아이들은 고 3 시절 동안 같이 놀며, 공부하고, 울고, 웃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그야말로 사춘기의 다이내믹 드라마를 같이 만들면서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들의 정서, 관계는 대학진학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같이 성장할 것으로 믿어진다.
이곳에서는 고등학교 3학년생들도 마치 노는 듯이 공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한국 등의 명문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학생들이 공부뿐만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협력하고, 원하는 활동을 탐색하여 참여하고, 리더십을 키우고, 봉사활동과 운동 등 다양한 비 교과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3년의 학교 생활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교시절의 경험과 추억은 아이들이 각자 선택한 나라에서 각자 선택한 학업으로 각자 선택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힘이 될 것이다.
오바마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을 본받자고 한 말이 한때 이슈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일정한 한 부분에 대한 것일 테다. 미국의 '공부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속담이 대변하듯 실제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들과 영국의 명문대학들은 입시에서 학업 성적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비 교과 활동에 큰 비중을 둔다. 이는 학생 개개인의 관심사와 열정을 깊이 탐구하고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중요하게 여기는 대학들의 개방적인 교육 환경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힐렐 학생회관에서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교육에 따른 토론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스탠퍼드 대학은 “지적 지평을 넓히는데 대한 약속, 헌신과 진정한 관심”을, MIT는 “지적인 위험을 감수하고 정상적인 교실 경험을 뛰어넘으려는 의지”를 강조한다. 특히, 스탠퍼드의 D 스쿨의 경우 창의성의 산실로 불릴 만큼 학생들의 토론이 유명하다.
옥스퍼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42개의 칼리지 이름이 붙은 기숙사 시스템에서 매일 저녁 학생들은 식사와 토론을 병행하며 즐기는 문화가 오래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시간만큼은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예술 등에 자신의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함으로써 지식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민정신(global citizenship)을 스스로 함양한다. 마치 세계적인 영국의 경제학자인 케인즈와 수학학자이자 문학가인 러셀이 대학의 토론모임에서 서로를 격려하였던 모습이 연상된다. 이렇게 명문 대학에서 학생들은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자신들의 견해와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의 장을 펼치며 세계 속의 개인으로, 개인에 의해 세계의 변화를 주도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 10개국에서 거주했던 나는 책이나 매체로만 접했던 다양한 선진국의 교육환경을 직접적으로 보게 되었는데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이스라엘에서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늘 무엇을 배웠니”가 아니라 “오늘은 어떤 질문을 하였니”라고 질문을 했으며 도서관은 조용히 책을 보는 곳이 아니라 2~3명이 짝지어 토론하는 곳이었다. 이태리 초등학교 수업은 매일 발표, 토론, 질문이 편성되어 있고 특히 로마 쪽은 아직도 과거 전통이 그대로 계승되어 교과서 없이 토론으로만 수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이렇게 자라온 아이들이 대학에 가 자신만의 사고를 체계적으로 형성하고 깊이 있는 공부를 통해 시야를 넓히는 진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 격렬한 토론으로 서로의 지적세계를 탐구하고 세계의 주요 문제들에 대해서는 각자 자신의 전공분야를 살려 스스로 비판, 대안을 해나갈 수 있는 아이들, 아니 갓난 어른들. 이들에게 세계는 미래를 맡기는 것이다.
자,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은 어떠한가? 이에 대해서는 20여 년간 한국을 떠나 있었던 내가 감히 무엇을 언급하겠냐마는 과거 내가 자라온 교육과 그다지 크게 바뀌지는 않은 듯하다. 형식은 변화했을지 모르지만 경쟁과 순위에 치중한 교육은 더욱 심해지면 심해졌지 결코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 성인이 된 친구들의 자녀얘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취직걱정, 돈걱정이 대부분이지 아이의 꿈과 사회문화에 대한 대화가 상실된 것만으로도 한국교육이 정체, 아니 오히려 퇴보하지는 않았는지 우려가 깊은 것이 사실이다.
외국생활 20년, 나는 아이들과 직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너를 둘러싼 10명의 친구가 바로 너의 미래를 결정한다"
전 세계에서 단 0.2%에 불과한 유대인 인구가 노벨상의 22%, 하버드 대학 재학생의 30%, 그리고 전 세계 부의 30%를 차지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한 사람도 뒤처지지 않도록 돕는, 믿음과 은혜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그들의 DNA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 뒤에는 교육과 전통의 틀이 있고, 그 근본에는 부모의 건강한 교육열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릴 때부터 경험하는 교육 환경과 전통, 콘텐츠가 바로 우리나라 젊은이들과 다르게 그들을 성공시키는 DNA인 것이다.
미안하기도,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한 사실을 지금 나는 가슴에 느낀다. 내가 외국에 20여 년 살면서, 글로벌적인 마인드를 키울 수 있는 교육환경에서 내 아이를 키웠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아이들을 키웠다면 지금 우리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자라 있을까? 다른 여대생들처럼 취직걱정에 연애도, 여행도 뒤로 미루고 매일 경쟁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을까....
이제 우리 기성세대가 변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좋은 친구 10명을 만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이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또한 부모로서 우리 자신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고,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눠야 한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독려하고, 그들이 서로를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오늘 졸업식에서 딸과 그녀의 친구들이 서로 어울려 밝게 웃는 모습을 보며, 지난 3년 동안 이 아이들이 얼마나 잘 성장했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성장한 그들의 모습에서 의미 있는 교육의 가치를 볼 수 있었고 깊은 교육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아이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표정은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미래가 담긴, 그런 표정이었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서도 그 표정을 볼 수 있을까? 걱정과 불안보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리고 세계를 향한 그들의 꿈이 펼쳐질 것을 믿는, 그런 희망찬 눈빛을 볼 수 있을까? 이것이 단지 우리 기성세대의 희망뿐인 것은 아닌지... 이미 늦은 것은 아닌지... 살짝 우려가 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민족의 힘,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해야 할 무언가의 가치를 믿어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