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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bu Jul 05. 2023

스톡홀름 재즈 클럽, 스탐펜


토요일 밤,

갑자기 주어진 자유시간.

아이들 둘 다 친구 집에 자러 가서 밤 나들이가 가능하게 되었다.


북유럽 책자를 펼쳤다. 관광객처럼,

저번에 어디선가 본 재즈 바가 있었는데 하며 책장을 팔락팔락 넘겼다.

찾았다. 스탐펜,


여기를 가봐야겠다. 주말 저녁 재즈 공연이라는 호사라니

아이들과 함께는 시간도 늦고 가기 힘드니까,

관광객 모드 장착하고 출동했다.


오늘은 어떤 밴드가 나올까. 인스타에서 스탐펜을 검색했다.

음, 재즈 밴드라고 하기엔 아저씨 넷이 차 앞에서 폼 나게 서 계셨지만 지금 이 소중한 시간을 헛되게 보낼 순 없다. 저녁 9시부터 한다고 하니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가서 구경하면 되겠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여행책자에 나온 이탈리안 와인 바에 먼저 들렀다.

에노티카 코르비나,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이름도 멋있어 보인다.

이미 안쪽은 다 자리가 차서 바에만 자리가 있다고 한다.

나갈까 하다가

탑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고 적힌 인증 팻말을 보고 다시 들어가서 바에 앉았다.

세 명의 서버가 굉장히 바쁘게 와인을 추천하고 서빙하며 바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주인장으로 보이는 어딘가에 작은 포도밭을 가지고 있을 거 같은 40대 후반의 아저씨,

대머리에 목걸이와 팔찌를 여러 개씩 두른 패션 센스 있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그리고 3초 어바웃 타임 영화 남주와 닮은 20대 후반에 금발 청년이 있었다.


우리는 책에 가까운 와인 리스트를 펼쳤다.

그림 하나 없이 폰트 8로 빽빽이 적힌 리스트를 받아들곤 고를 수 없어서

금발의 청년에게 추천을 요청했다.

추천해 줄래?라는 말과 간격이 0.3초도 되게 그가 대답했다.

정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토스카나, 바롤로 블라블라블라

잠깐 뭘 고를까 하다가 결국 다 마셔보기로 했다.

처음 보는 라벨에 읽을 수도 없는 이름이지만 브리딩이 이미 잘 되어 있었을까?

너무 맛있었다!

토스카나 와인은 토스카나 와인답고

바롤로는 과실향이 엄청난데 중후함도 느껴졌다.

이후 아마로네

또 다른 바롤로

마지막에 샴페인까지

조금씩 마셨지만 기분은 최고로 좋아졌고 신이 났다.


와인을 서빙하기 전에 꼭 맛을 보는 아저씨 셋을 보며

와! 여긴 최고의 직장이 아닐까라는 농담을 했다.

뭐든 물어보면 0.3초 안에 답을 내놓는

그들은 전문가였다.

끊임없이 와인을 나가기 전에 테이스팅을 하는 모습을 보며

저러다간 집에 갈 때쯤엔 고주망태가 되겠는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셋 다 얼굴이 살짝 붉긴 했지만 취한 거 같진 않았다.

대단한 책임감으로 완벽한 와인을 내겠어라며 맛을 보고 있는 거 같았다.

반면 우리는 이대로 재즈 바에 가면 아주 즐거울 정도로 살짝 취기가 올랐다.



공연이 12시까지라고 했으니 이제 슬슬 가볼까 10시가 넘어서 우리는 스탐펜으로 향했다.

클럽 앞은 삼삼 오오 작은 무리들이 클럼 앞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공연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우리는 스탐펜 안으로 들어갔으나

안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1층은 워낙 작았고

어둑하고 크지 않은 곳이라 처음엔 분위기 좋은 바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걸 보니 아마 지하에 공연장이 있나 보다.

내려갔더니 주말 저녁을 즐기러 나온 스톡홀름 사람들이 있었다.


음, 그런데 눈이 익숙해지고 찬찬히 둘러보자 조용한 분위기와 달리 차림새가 남달랐다.

긴 머리에 가죽잠바가 마치 유니폼인 듯 입은 사람들이 1/3

가만 보니 팔 전체 혹은 다리 전체에 타투를 한 사람들도 1/3은 되어 보였다.

와우, 완전히 자유로운 영혼들의 모임이구나.

낮에 거리에서 보던 스웨디시들과도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 둘은 뭐 거의 다른 행성에서 갑자기 여기 떨어진 모양새였다.


다시 한번

오늘 공연을 소개하던 인스타에서 본

올드카 앞에 폼 나게 서있던 네 명의 아저씨가 떠올랐다.

혹시 롹인가.

대체 언제 공연을 했고 언제 공연을 할 건지 궁금한 우리와 달리

스웨덴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공연을 기다리거나 옆에 있는 누군가와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연은 언제 하냐고라고 궁금한 사람은 또 한국인 두 명뿐,


30분을 기다려도 공연을 할 기색이 없어 보이자

아까부터 옆에 서 있고 방금 전에 눈을 마주치며 목례해 준

우리 옆에 나이 드신

그러나 차림새는 20대 청춘인 (소매 없는 청재킷 청치마에 여기저기 타투까지) 아주머니께

공연은 언제 해?라고 물었다.

좀 기다리면 할 거야.

그럼 그렇지. 느긋한 사람들. 괜히 물어봤다.


그러더니 아주머니와 남편은 대화를 이어갔다.

아주머니의 자기소개,

자기는 60대이고 (헉)

공장에서 일을 오래 했고

주말에 친구들이랑 이렇게 나와서 즐기는 걸 좋아한단다.

갑자기 친구를 소개해 줬다.

친구에 비하니 아주머니의 모습은 양반이다.

친구분은 일본의 가부키가 생각나는 화장에 롹스피릿 옷의 콜라보다.

친구는 아티스트란다.

난 모습만으로도 정신이 약간 혼미해졌지만

우리는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진지하신 아주머니,

전쟁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쟁을 당장 끝내야 한단다.

내 딸도 너네 나이쯤인데

너네가 너무 안됐단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긴데,,

친정엄마가 항상 하는 이야기

너네가 살기가 힘든 세대라며

이 현란한 모습의 아주머니에게서

한국에 계신 친정엄마와 같은 멘트가 나올 줄이야.


당장 전쟁을 끝내야 하고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아주머니는 급기야

마음을 추스르며 글썽이는 눈물을 보이셨다.

난 살짝 먼 산을 바라봤고

나보다 대화에 열심히던 남편은

아주머니와 함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을 추스른 아주머닌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며

행복하게 살자고 하신다.

눈물을 보여서 미안하단다.

서로 악수하고 찐한 포옹을 했다.

처음 만난 사인데,,,

우리가 만난 60대 스톡홀름 거주 평화주의자.


때마침 무대 쪽이 부산스러워지기도 했고

사람들이 바 쪽에 몰려서 줄 서서 맥주를 사기도 해서

우리도 거기에 합류했다. 맥주 한잔 사서 공연을 보기로

드디어 나오나 보다.


역시, 오늘은 롹이구나.

이것도 인스타에 사진은 점잖은 젊은 시절에 밴드 앨범 커버였나 보다.

대머리인데 장발인 록 스피릿 가득한 강렬한 인상의 아저씨와 그의 친구들이 등장했다.

지잉지잉좌앙좌앙, 두두두두 두둥 둥 둥. 보컬 아저씨의 끼야야아~~~~~

메탈에 가까운 록이다.

귀가 찢어질 거 같은 느낌이 언제였더라. 그래 20대 때 갔던 콘서트.

나는 놀랐지만 롹을 좋아하는 남편은 매우 즐거워했다.

옷은 현란했지만 얌전하게 담소만 나누던 관객들도 돌변했다.

특히나 무대 바로 앞에 자리 잡은 관객들은 열정적이었다.

이번 주에 쌓인 스트레스는 여기서 다 날려버리겠다는 듯

혹은 이 밴드의 오래된 골수팬인 듯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우리는 이왕 온 거 앞쪽에서 즐겨보자며 열정적인 관객들 뒤에서

밴드도 구경하고 관객도 구경했다.

밴드가 4곡 정도 부르자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고

다들 신이 났다.


여기도 멋진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다.

덩치가 약간 있으시며 매우 생기 넘치는 표정의 아주머니는

온몸으로 음악을 즐기고 계셨다. 앞쪽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 사이에 간격이 거의 없기 마련인데

아주머니의 포스에 눌려서인지 아주머니 주변은 살짝 간격을 두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머니가 음악에 맞춰 머리를 돌리고 몸을 흔들기 시작하면

좀 떨어져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눈치 없이 저기 자리가 비었네라며 아주머니 뒤로 가서

그녀의 영역을 침범한 한 관객을 아주머니가 사정없이 엉덩이로 밀어내는 모습을 우리는 봤다.


우리 둘은 또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바라봤다.

지금 저거 봤어? 이런 눈빛으로...

그리고 내 옆에 있던 가죽잠바를 입은 키 큰 아저씨도 흥에 겨워 몸을 흔들다가

내 재킷에 맥주를 흘려주셨다. 계속 몸을 흔들며 미안하다고 했고

와중에 미안하다고 해준 사실에 감사해야 할 정도의 흥분의 도가니였다.

나에게서 맥아의 냄새가 솔솔 났다.


절정을 지나 공연은 끝이 났고

달뜬 표정의 관객들은 열기를 식히기 위해

자리를 떴다.

우리도 무리에 섞여서 지하 공연장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무리 사이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들어가기 전과 같은 풍경이다.

클럽 앞은 삼사 오오 작은 무리들이 앉아서 클럼 앞에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스탐펜 안에서의 공연도 만난 사람도 잠시 잠깐의 다른 세상 같았다.

무엇보다 오래간만에 스트레스를 싸악 날렸다며 밝아진 남편의 표정을 보니

내 고막 속에 위잉 하는 소리가 사라지지 않는 것쯤은 문제 되지 않았다.

나도 간만에 신기한 경험을 했노라며 다음번엔 재즈 공연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스톨홀름의 또 다른 모습을 뒤로하고 우리는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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