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말 스톡홀름 문화의 밤 행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둘째 아이 친구 부모님을 통해 들었다.
저녁 6시 이후에 박물관, 극장, 화랑 등을 무료로 개방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한다.
공유해 준 링크를 들어가 보니 스톡홀름 곳곳에서 문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스톡홀름 문화의 밤 행사에 참여한 한국문화원에서는 떡볶이와 붕어빵을 무료로 제공할 예정이라고?! 떡볶이라니!!
한국문화원에 가야겠다. 떡볶이를 먹기 위해서,
쌀떡? 밀떡? 과연 무슨 떡이 나올까. 떡볶이가 먹고 싶으면 아시안 마트에 가서 포장된 떡볶이 키트를 사면 되었겠지만 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그러지 않았다. 떡볶이 안에든 어묵이랑 튀김, 삶은 계란을 더 좋아하는 여자는 잠시 떡볶이를 잊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떡볶이를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잊고 지냈던 떡볶이가 번쩍하고 머릿속에 불을 밝혔던 것이다. 윤기가 도는 다홍색 국물에 매끈한 떡 매콤하지만 달콤한 떡볶이. 아 얼마나 매력적인가. 어린 시절 학교 앞에서 밀떡 떡볶이 국물에 계란 노른자를 스삭스삭 으깨어 섞어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떡볶이란 단어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꼭 먹고 말겠어!
기쁜 마음에 "나 토요일에 떡볶이 먹을 수 있을 거 같아!"라고 단톡방에 자랑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친구들이 한없이 불쌍히 여겨줬다. 궁중떡볶이, 짜장떡볶이, 기름떡볶이, 로제떡볶이까지 종류별로 시키기만 하면 오는 떡볶이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난 얼마나 가엽은 존재인가. 그리하여 친구들이 스웨덴에 있는 나에게 물어봐 준 건 고작해야 네가 먹을 떡볶이는 밀떡일까 쌀떡일까였다.
대망의 토요일, 한국문화원의 행사 시작은 6시였다.
7시쯤 둘째 아이 친구가족이랑 문화원에서 만나기로 해서 시간 맞춰 출동했다.
떡볶이를 향해 출동!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친 건 나 하나. 떡볶이에 들뜬 40대 여자.
한국 문화원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꽤 많았다. 모두 떡볶이 소문을 듣고 온건 아닐 테고 한국에 관심이 많은 스웨덴 사람이 이렇게 많았단 말인가. 아니면 스웨덴 사람들이 모두 스톡홀름 문화의 밤을 즐기러 나온 것인가.
문화원 입구에서 들어가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에 살짝 놀란 우리는 입장하자마자 떡볶이를 찾아봤다.
하지만, 이럴 수가, 한발 늦었다. 떡볶이는 이미 끝났단다. 믿을 수 없어.
음식코너인 위층에 올라가 보고 나서 아 정말 이미 끝났겠구나 싶었다. 음식코너 앞에 스웨덴 사람들이 한 층의 옆면을 따라 주욱 늘어서 있었다. 줄을 따라 급하게 앞으로 나가보니 음식 하시는 분들은 미니 붕어빵만 굽고 계셨다. 이런 정말 끝났구나. 떡볶이는 흔적도 없었다. 떡볶이도 아닌 붕어빵에 이렇게 긴 줄을 서 있다니 게다가 미니 붕어빵인데,,,,,, 실망감만 한가득이다. 스웨덴 사람들답게 느긋하게 줄을 서서 붕어빵이 구워지길 기다리는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뒤로 슬쩍 빠졌다. 한순간에 떡볶이의 꿈이 달아나 버렸다. 그렇게 떡볶이 냄새도 맡아보지 못하고 후퇴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한국 문화를 즐기는 스웨덴 사람들이 문화원에 가득했다. 붓글씨 체험 코너에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한지에 까만 먹을 찍어 붓으로 한 자 한 자 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한 무리가 있었다. 라면이라는 글자를 쓰고 진지하게 자기가 쓴 붓글씨를 보는 청년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아래층 한쪽에선 다 큰 남자 어른들이 딱지를 접어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역시나 진지하게 두꺼운 종이로 딱지를 직접 접고 있는 스웨덴 사람들이 서넛 모여 있었다. 소리만 크고 뒤집히지 않는 딱지를 보며 이건 힘으로 되는 게 아니랍니다 하고 알려주고 싶었다. 1층에선 신발 벗고 들어가서 차를 마시는 카페도 마련되어 있었다. 외국인들이 밖에서 신발 벗고 어딘가 들어가서 가부좌로 앉아 있는 모습이라니, 낮은 계단을 올라가는 곳 앞에 벗어놓은 신발들이 갑자기 나를 한국에 감자탕 마룻바닥으로 소환했다. 이게 다 떡볶이를 못 먹어서다. 한국음식이 그립다. 그럼에도 굳이 스웨덴 마트에서 식재료를 다 해결해서 음식을 해 먹고 있는 나는 한국마트에 가기 귀찮아서 인지 아니면 여기서 적응해서 살아보겠다는 의지인지 내 행동과 마음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궁금해지는 찰나. 옆에 큰 방 앞에선 안이 보이지 않게 사람들이 몰려서 입구를 막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들리던 노랫소리의 진원지가 여기였구나 했다. 그 방은 바로 노래방이었다!
방 안엔 큰 스크린에 노래방 화면이 띄워져 있고 외국인들이 한국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세상에 스웨덴까지 한류의 열기가 닿았을 줄이야. 지금 유창하게 한국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바로 스웨덴 사람이다. 아이돌 노래가 나오면 사람들은 환호했고 노래가 시작되면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물론이고 나머지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너무 놀라운 광경이었다. 대체 얼마나 연습했으면 한국 노래를 저렇게 부를 수 있나 싶었다. 댄스곡은 물론 발라드까지 부르고 있다. 살짝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감정을 실어 한국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신기했다. 지나가던 외국인 커플이 말했다. 오! 데이식스, 두 유 노 데이식스? 둘 중에 한 명이 데이식스를 알고 있다니. 데이식스가 스웨덴까지 진출했네. 겨우 틈을 비집고 입구가까이 가봤더니 제법 노래방 느낌이 났다. 노래방 기계, 노래방 책자, 큰 노래방 리모컨, 탬버린까지,
우리 아이들과 아이 친구들도 한곡 했다. 한복을 입고 뉴진스의 attention을 부르는 한국인 초등학생들을 스웨덴의 젊은 언니들이 큰소리로 환호해 줬다. 호응에 신이 난 아이들이 몇 곡 더 하는 바람에 결국엔 여긴 외국인이 한국 노래방을 체험해 보는 곳이야라고 행사의 취지를 이야기하고 끌고 나와야 했다.
노래와 춤은 국경이 없는 게 맞구나. BTS 노래를 멋지게 부르는 스웨덴 십 대 청소년을 보면서 생각했다. 스웨덴에서 느끼는 한류라니 내가 노래를 한 것도 아닌데 뿌듯하고 대견한 마음이다. 노래방에선 댄스곡 발라드곡이 번갈아 들렸고 저 노래를 부를 정도면 얼마나 많이 듣고 따라 불렀을지 생각하니 한류 덕후들이 귀여웠다. 스웨덴에 부는 한류 바람을 보고 나니 한편으로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고 한편으론 그동안 스웨덴 사람에 대해 내렸던 내 나름의 정의가 달라져야했다. 이들은 어떤 이들인가. 표정 없고 수줍어한다고 생각했던 스웨덴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확고한 취향에 맞게 한국아이돌 가수를 열광적으로 좋아하고 노래를 열심히 연습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생각했다. 역시 어딜 가나 노래와 춤은 모두를 즐겁게 해 주고 하나로 만들어 준다.
집으로 가려고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나가는데 오페라 극장 앞에 입장을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행사가 한참인 듯 보였다. 길 곳곳에는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스톡홀름 문화의 밤은 겨우내 움츠려 있던 사람들에게 이제 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행사구나 생각하며 차창밖에 사람들을 구경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못 먹은 떡볶이는 아쉽지만 오랜만에 만난 노래방은 참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