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와보니 현관옆 잔디에 내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들꽃이 피어 있었다.
꽃잎의 끝은 짙은 보라고 아래로 갈수록 옅어져 꽃받침과 꽃이 닿은 곳은 결국 하얗다.
꽃 수술은 아주 노오란 개나리빛의 꽃이다. 바닥에서 10센티정도 자라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여행은 고작 3일이어서 꽃이 피기 전에 잎이 올라왔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아니면 설마 3일 사이에 급속도로 핀 것일까?
여하튼 우리 넷은 집을 비운 사이 꽃이 피어단 사실이 놀랍고 반가웠다. 덴마크에서 부러워했던 꽃망울들이 결국엔 스웨덴까지 번진 느낌이었다.
밤새 차를 타고 달린 우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부활절 휴일에 감사하며 아침을 먹고 다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항상 조용하기만 한 주변이 놀랍게도 사부작사부작 지잉 지잉 소리를 내며 소란스러운 것이 아닌가? 그동안 운동하는 사람들 외엔 잘 보이지 않던 스웨덴 사람들이 드디어 집 밖으로 나온 것이다. 정원을 손보고 집 밖을 청소하고 있었다. 옆집 아이와 아빠는 함께 창문을 닦고 뒷집 아주머니는 이불을 털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집에서 텔레비젼만 보는구나 싶었는데 모두 나와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봄맞이 대청소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건 갑자기 길어진 해다. 겨울에 왔을 땐 4시면 밤처럼 깜깜했다. 하지만 지금은 서머타임으로 한 시간이 앞당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저녁을 먹고 나서도 해가 지지 않는다. 이렇게 한두 달 더 지나면 백야가 오는가 보다.
혼자 생각했다.
참으로 극단적인 곳이네.
3월 말 서머타임을 시작할 때만 해도 여름이 오지도 않을 텐데 왜 시간을 앞당기는지 의문스러웠는데 비록 날씨가 따뜻해지진 않지만 이렇게 해가 길어진다면 서머타임을 할 만도 하다. 해돋이도 훨씬 빨라졌다. 해가 빨리 뜨고 늦게 진다. 북위 37도에서 살던 나는 북위 62도에 위치해서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었음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살면서 새의 활동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집이 외곽이라 집 주변 나무에 새 가족들이 여럿 살고 있다. 한국이랑 똑같이 생긴 까치 가족과 비둘기 가족 그리고 여기서 처음 만난 박새 가족이 심심치 않게 마당에 와서 무언가를 열심히 쪼아 먹는다. 확실히 오전엔 내 앞마당이 아니라 새들과 공유하는 구역이다. 그러던 최근엔 봄이 되려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좀 더 들리네 했는데 얼마 전엔 새소리에 밤중에 깼다.
아무 이유 없이 자다가 눈이 떠진 날이었다. 하늘은 아직 어스름하지도 않은데 왜 깼을까 싶어 시계를 봤더니 새벽 4시였다. 새벽이 오려고 해도 아직 한 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할 거 같았다. 누워서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은 까만 밤은 아니지만 아주 진청색의 하늘이다. 아직 밤인데 생각하던 중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있다. 삑 삑 삑, 째째 째째, 두르 두르 두르, 우후 우후, 족히 7종은 넘을 거 같은 새들이 마구 지저귀고 있다. 이렇게 부산스러울 수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벌레를 잡아먹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새는 정말 일찍 일어나는구나. 혼자 누워 짙은 진청색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4월의 산책은 나무에 새싹이 아직이었다. 간혹 나뭇가지 끝에 연두를 살짝 흩뿌린 거 같은 나무들이 보인다. 그래도 날이 좋으면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아주 하늘색이다. 스웨덴 사람을 닮은 진한 하늘색. 얼굴에 닿는 바람은 여전히 매우 차지만 겨울의 바람과는 확실히 다르다. 동네를 산책하며 집집마다 발견한 들꽃을 보는 재미에 쌀쌀한 바람에도 산책을 나갔다. 들꽃은 우리 현관 옆에 핀 것보다 훨씬 더 작고 땅에 붙어 있다. 두 살 베기 꼬맹이 같다. 자잘한 보라색과 흰색 꽃이 나이가 오래된 집 마당일수록 많았다. 작은 꼬맹이들은 어김없이 나무 밑에 둥글게 둥글게 자리를 잡고 나무 둥치 쪽으론 빽빽히 밖으로 갈수록 드문드문 엄마 곁에서 노는 아이들같아 보였다.
스웨덴의 봄은 더디게 왔다. 여행은 4월 초에 다녀왔고, 지금은 5월 초순을 막 지났다. 금세 봄이 올 거라고 들떴던 나는 따뜻해질 것만 갔던 스웨덴 날씨에 한 번 더 당했다. 날은 다시 추워졌다. 비가 흩뿌리는 날도 꽤 있었고, 해가 없는 흐린 날은 다시 초겨울 패딩을 꺼내 입어야만 할 만큼 추웠다. 가지 끝에 나뭇잎들은 쉽게 돋아나지 못했고 꽃들도 바닥에 나지막이 붙은 들꽃이나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그리고 4월 말 드디어 벚꽃을 볼 수 있었다. 스톡홀름 시내 왕의 정원이라는 곳에 벚꽃이 핀다고 스톡홀름 관광청에 자랑스럽게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여의도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뭐야. 여긴 벚꽃도 이게 다야?
그리고 5월 초, 드디어 동네에도 곳곳에 목련, 산수유, 개나리, 벚꽃, 민들레, 튤립까지 꽃이 만개하고 있다. 두 살 베기 들꽃들은 지고 그 자리를 잔디가 채워주고 있다. 나무들도 이제는 돋아나는 새잎을 어찌하지 못하고 하루가 다르게 이파리들이 어깨를 피고 있다. 본격적인 봄이 오길 한 달이나 기다린 셈이다.
아! 드디어!
오늘 나간 산책은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과 꽃, 새들의 합창에 봄을 한껏 누릴 수 있었다. 동네를 따라 걷다가 숲으로 들어갔다. 북유럽 답게 숲에 나무들은 모두 키가 무척이나 크다. 하늘과 가까워지기로 작정이나 한 듯 큰 키를 자랑하는 나무들은 쭈욱 하늘로 뻗어 나를 땅꼬마로 만든다. 지나가다 간혹 만나는 사람들은 커다란 개와 산책 중이다. 잠깐 스쳐 지나가면 숲은 다시 내 것이 된다. 온몸이 숲의 공기로 상쾌해진다. 침엽수 낙엽이 푹신하게 깔린 오솔길은 발을 뗄 때마다 폭신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코가 뻥 뚫린다. 큰 숨에 어깨가 펴진다. 이제껏 움츠러들어 몸도 마음도 추웠던 스웨덴에서의 겨울이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