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북클럽에서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를 읽었습니다.
작년 이맘때 책을 사놓고 몇 페이지 보다가 엄마의 죽음이 자꾸 떠올라 힘들어서 치워 놨는데, 다시 용기를 내어 읽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느끼는 상실의 고통과 그리움에 이입되어 애써 시간으로 무디게 만든 그날들을 또 한 번 살고, 울었습니다.
책장을 더디 넘기며, 엄마의 죽음에 대해 쓰는 것은 정육의 과정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핏덩이 같은 날 것의 경험을 뼈 채로 잘라 살코기를 저며 적당한 사이즈로 잘라 비닐에 넣고 냄새가 새어 나오지 않게 진공 포장을 해서 이름과 날짜가 찍힌 스티커를 붙여 내보내는 것.
차마 마주하기 힘든 과거를 흘끗이라도 볼만한 상태로 재단하고 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작가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상실의 마음을 ‘Let go’하기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책 '과거가 남긴 우울 미래가 보낸 불안'에서 애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애도의 끝에서는 반드시 상실한 대상을 잘 보내 주어야 합니다. ‘보내 주다’는 ‘잊어버리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상실을 받아들이고 나에게서 떠나보낼 때 비로소 그 대상과의 관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건강하게 연결됩니다. 마침내 회복의 길에 들어서 현재를 충만히 살아갈 수 있지요. 이제는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떠올리며 잘 화내고, 잘 울고, 잘 두려워하고, 잘 그리워하고, 잘 보내 주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애도의 과정입니다.
“슬픔은 계속 가져가야죠.” 충분한 애도의 끝에 서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실을 통해 도리어 성장을 경험한 사람들이 슬픔을 대하는 수용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슬픔을 계속 가져간다’는 말은 계속해서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고통스러운 상실을 경험한 나를 애도하며 함께 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동치고 갈 곳을 몰라 떠도는 괴로움을 잠재우는 데는 글쓰기가 괜찮은 처방전 같습니다.
부유하는 마음을 모두 갈무리하지는 못한다 해도, 내 마음의 상태 바가 어디쯤 있는지는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글쓰기는 과거를 애도하는 과정이 됩니다.
과거에 천착해 있다면, 반추에 매몰되어 있다면 글로 마음을 정돈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영어 듣기 평가 때 자주 듣던 말로 마침표를 찍어봅시다.
"Let's move on to the next page."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소설을 쓰거나 읽을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과거란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옛날 jadis에 비해 과거 passe를 결정짓는 요인이다.
과거는 바꿀 수 있지만 옛날은 바꾸지 못한다.
시대에 이어 국가, 공동체, 가족, 생김새, 우연, 즉 조건이 되는 무엇이 끊임없이 과거를 좌지우지한다.
질료, 하늘, 땅, 생명은 영원토록 옛날을 구성한다.
옛날에 대하여, 파스칼 카냐르
*이 내용은 책 ‘회복탄력성’, ‘과거가 남긴 우울 미래가 보낸 불안’에서 일부 영감을 받아 그리고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