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한 여자를 얻기 위해 그녀의 부모님 앞에 무릎 꿇는 장면의 주인공이 될 줄이야.
몹시도 추운 겨울날, 그녀의 아버지 앞에 선 나는 지금이 겨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모든 것은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나는 그녀의 집 앞이나 그녀의 집 현관 어디쯤에 무릎을 꿇고 교제를 허락해 달라며 시위하고 있어야 했다. 다리가 저리도록 오래 꿇어앉을 각오로 왔는데, 지금 서있는 곳은 그녀의 집 근처 가로등도 없는 골목길이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옆에서 그녀는 안절부절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서있었다.
입은 얼었고, 발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때는 왜 롱패딩 같은 게 없었을까? 아니, 롱패딩이 있었어도 그녀의 부모님을 처음 뵈러 가는데(초대받지는 않았지만) 패딩을 입을 순 없었겠지. 이 추운 날씨에 밖에 오래 서있게 될지 모르고 코트와 구두로 차려입고 갔다. 방한복을 입고 갔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추위에 얼었던 건지 그녀의 아버지에 압도되었는지 모르겠다. 준비해 갔던 말은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뱉지 못했고, 그녀의 아버지의 말에 설득당했다. 대학생 3학년인 그녀가 너무 어리고 세상물정 몰라서 교제를 허락할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말에 아무 반박을 할 수 없었다.(그녀가 세상물정 모르는 순백의 스타일인 것은 사실이었다.) 얼어붙은 공간에서 흐르지 않는 듯한 고작 몇 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경험이 부족했다.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더 생각하고 갔어야 했는데..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그래도 현관까지는 들어가게 해주지 않나? 어떻게 집 안으로 들이지도 않을 수 있었을까, 그래도 딸내미의 남자친구라는데 말이다.
그렇게 부모님의 마음은 설득하지 못했고, 나는 좌절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얻었다. 추운 밤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갔던 나의 진심은 결과적으로는 얼어붙어가던 그녀의 심장을 완전히 녹였다. 그녀의 핸드폰까지 압수당하며 진짜 끝인가 생각도 했지만, 몇 주 뒤 그녀의 연락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학생이고, 다 큰 성인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지. 완전히 마음이 녹은 그녀는 연락두절 된 그 시간 때문에 오히려 나를 더 갈망하게 되었다. 당당하게 만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더 애틋하게 연애를 시작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왜 그렇게 죽을 각오로 사랑했는지 나는 안다. 운명의 사랑? 선남선녀의 만남? 그런 게 아니다. 그냥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더 악착같이 사랑한 거다.
거짓말 할 때면 순식간에 발그레해지는 그녀의 양볼이 문제였다. 그녀는 부모님의 불신검문에 항상 걸려들었다. 몰래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때면, 1~2주 연락도 못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힘든 시간이 반복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람의 거짓말을 난 왜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나랑 만나면서 능청스럽게 변한 건가? 아무튼 자의가 아닌 가(家)의에 의해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몹시 힘들었다. 특히 그녀는 나보다 훨씬 힘들었겠지.
결국 이별을 통보받았다. 이대로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하자는 흔한 이야기.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떳떳하게 축하받을 수 있는 만남을 하고 싶다며 흘리는 진심 어린 눈물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끝이 났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날 때마다 더 각별해지고 더 단단해지기만 할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도 갈대 같았다. 갈대는 단단하지 않다. 바람에 흔들리는 한없이 가벼운 존재였다. 그녀의 가족의 입김에, 친구들의 손사래에, 나의 달콤한 속삭임, 모든 것에 흔들리는 본인의 마음에 이리 흔들, 저리 흔들. 계속해서 부는 바람 방향으로 그녀는 기울었다. 결국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폭풍 속의 갈대처럼 그녀는 갈 곳을 잃고 주저앉아 버린 것이었다.
"나 호주에 워킹홀리데이 가려고."
몇 달 만에 온 그녀의 문자에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는 한 줄뿐이었다. 문자를 보는 순간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원하고 있었다. 놀란 기색 없이 아무렇지 않게 답장을 했다.
"언제 가려고?"
"내년 1학기."
"알았어."
'워킹홀리데이가 뭐지? 뭔지 모르겠지만 가야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갈 수 있는 건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내년에 가는 걸로 비자 신청을 해서 통과가 돼야 하고, 비행기 표를 사야 하고, 가서 일하기 전까지 정착하기 위한 돈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학기는 시작되어 있었고, 6개월 후에 합격해야 하는 국가공인 기술자격증 시험도 있었다. 그러니 비행기 표를 위해 일 할 시간은 없었다.
돈을 구할 방법은 단 하나, '장학금'. 그리고 전액 장학금을 받아냈다. All A+. 2학년 때까지 학점 평균이 2.0 근처였던 걸 보면 내가 똑똑했던 건 아닌 거 같은데, 이렇게 쉽게 전액 장학금을 받아낸다고? 그것도 전체 학점 A+로?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학교 학점 받는 게 제일 쉬웠다. 매일 술에 취해서 수업을 듣고, 시험 기간에 PC방이나 가고, 당구장에서 살고.. 그렇게만 안 했어도 전학기 장학금도 노려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아니면 사랑의 힘인가? 반드시 호주행 비행기 표를 사겠다는 의지. 장학금이 아니면 갈 수 없다는 현실이 나를 더 독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워킹 홀리데이 가려고.'라고 말했던 그녀는 문자 이후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도 특별히 연락하지 않았다. 호주를 함께 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장학금을 받고, 비행기표를 휴학 및 복학 일정에 맞춰 예약을 하고 나서 그녀에게 알렸다.
그녀는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내가 호주로 떠나기 2개월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6개월의 시간은 그녀의 가족들이 나의 존재를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그녀는 이리저리 흔들리던 갈대에서 조금은 더 깊게 뿌리내린 강아지풀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마음엔 조금 더 여유가 있었고, 부모님에게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 성인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래 보였다.
이번의 만남은 계약 연애였다. 내가 호주로 떠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약 2달. 그녀는 싱긋 웃으며 우리는 2개월의 시한부 연애를 한다며 농담처럼 얘기했다. 너무 발랄하게 웃으며 얘기하길래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다. 호주로 떠나기 1주일 전까지도 난 그런 줄 알았다. 남자친구를 군대 보낼 때 헤어지는 걸 걱정해서 미리 헤어지는 바보 같은 이별을 내가 왜 겪고 있는 거지? 심지어 군대 가는 것도 아닌데.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 가는 것도 아닌데. 아니 네가 호주 간다며~~ 너 호주 갈 테니까 나보고 오라는 말 아니었어?(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녀 역시 호주에 왔다.)
평소에도 서프라이즈를 좋아하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계약 연애며, 시한부 연애며 그냥 그러려니 했다. 설령 그게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만나는 시간 동안 진심을 다해 마음을 표현하면 괜찮을거라고 생각했다. 시한부 연애로 끝내겠다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건 자신있었다. 내 예상대로 그녀는 더 이상 나에게 계약 연애니 헤어질 예정이라느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진심을 알기에 차마 입 밖으로 이별의 단어를 말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호주로 떠나는 날 공항까지 배웅하러 나온 그녀는 큰 눈이 쏟아질 정도로 펑펑 울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끊임없이 울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울음을 멈추고는 땅을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잘 들리지 않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