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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3. 커피 믹스부터 소주까지

스펀지 같았던 그녀의 최후

by 라텔씨

"bonjour"


그녀의 첫인사가 '봉쥬르'였는지, '헬로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국적 셰어하우스를 표방했지만 한국인이 절반이었던 그곳에 그녀가 들어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호주에 온 그녀는 거침없었다.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한국 사람들이 수줍어하는 것과 다르게 그녀는 모든 것에 자기 주도적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망설임이 없었고, 스스로 결정했다. 불어의 부드러운 음율 중간중간 껴 나오는 쇳소리? '크'와 '흐' 중간 어디쯤의 발음과 함께 프랑스인의 강한 생활력의 이미지를 보여줬다.


그녀는 셰어하우스에 짐을 풀고, 생활비를 아끼기 위한 식료품들을 사놓고는 바로 일을 구하러 나갔다. 그리고는 몇 시간 만에 돌아왔다.


"20군데에 연락처 남겨놓고 왔어요."


그녀는 그날 바로 카페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시급 20달러, 주말에는 25달러를 주는 곳이었다. 나도 당시에 일을 하고 있었다. 수제 햄버거 가게 주방에서 시급 10달러를 받고 있었고, 밤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9달러를 받으며 일했다. 오로지 영어로만 대화하며 일해야 하는 환경이 두려웠다. 그래서 10달러만 받는 것이 부당한 환경임을 알고서도 영어가 불필요한 곳에 근무했다. 많은 곳들이 그랬다. 특히 영어 실력이 좀 부족한 한국인, 일본인들을 채용하는 곳들은 대부분 알바비가 낮았다. 악덕 업주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저렴한 시급에도 일하겠다는 수요가 있으니 그들도 마다하지 않은 것일 뿐이니까.


그녀는 오전에 카페에서 일을 하고 오후 3시면 돌아왔다. 그리고 시드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함께 사는 한국인 언니들은 그런 그녀를 매우 좋아했다. 갓 20살을 넘긴 청소년 같은 그녀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잘 챙겨주고 싶었을 거다. 함께 바다를 갔고, 모래사장에서 선탠을 했고, 맛있는 것을 먹었다.


한국인들의 특징이 있다. 자국의 맛을 외국인들이 꼭 경험하게 하고 싶어 한다. 금요일이면 열리는 홈파티에는 매번 다양한 국적의 안주들이 등장한다. 그런 날이면 한국인들은 반드시 빨간 양념 요리를 준비한다. 일부러 그런다. 한국인의 맛은 매운맛이라고 보여주고 싶은 건지, 닭도리탕, 고추장찌개, 수육과 김치를 만든다. 빨간 양념으로 범벅인 음식들을 본 유럽 친구들은 지레 겁먹고 '하.. 너넨 도대체 이걸 어떻게 먹는 거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물론 그들도 매운 종류만 아니면 한국 음식을 엄청 좋아했다. 한 번은 간장 베이스의 찜닭을 해주니 게눈 감추듯 해치워버리더라.


그녀는 잼을 직접 만들었다. 심지어 마요네즈도 직접 만들었다. 프랑스 가정집의 문화인 거 같다. 그녀는 몇 시간을 과일을 졸여서 잼을 만들고, 계란 흰자를 휘저으며 마요네즈를 만들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냉장고에서 마요네즈를 하나 꺼냈다. 한인 슈퍼에서 사 온 '오X기 마요네즈'였다. '고소한 맛'이었다.


"이거 맛 좀 봐, 크리스텔"

"오 마이 고쉬, 이거 어디서 사?"


그녀를 데리고 한인 슈퍼를 갔다. 그녀에게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문자 들이었겠지만, 나는 자신 있게 몇 가지를 추천했다. 과자 '프렌치 파이', '누네띠네', 캔커피 '레쓰비', 믹스커피.


"이거 이름이 'French Pie'야."

"ㅋㅋㅋㅋ"

"이것도(누네띠네) 프랑스 과자처럼 만든 거야."

"ㅋㅋㅋㅋ"


Ice • Coffee.jpg


그녀는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이따위 조잡한 과자에 프렌치라는 이름을 사용하다니'라는 표정이었다. 차라리 '맛동산'이나 추천해 줄 걸 그랬다. 그래도 달달한 캔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뭐야? 커피야?"

"응. 달콤하지?"

"이거 정말 맛있다!"


한국에서 파는 가격과 얼마 차이 안나는 저렴한 캔커피의 맛에 놀란 그녀에게 덤으로 믹스커피도 선물해 줬다. 믹스커피를 마신 그녀는 환호성을 질렀다.


"도대체 이게 뭐야? 내가 먹어본 커피 중에 이게 최고야."


그녀는 틈만 나면 코리안 믹스 커피를 예찬했다. 심지어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 커피 스틱을 갖고 가서 직원들과 함께 마시기도 했다. 그녀는 그 이후로 한국인들이 권하는 모든 음식에 거부감을 일단 내려놓았다. 타국가의 문화에 인색한 프랑스인이 동양의 작은 나라 음식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믹스 커피 스틱 하나였던 것이다. 그녀는 매운 음식만 빼고는 거의 모든 음식에 도전했다. 빨간 음식이라고 무조건 매운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외국인이라면 가장 혐오한다는 식재료인 낙지를 사다가(한인 마트에서 냉동 낙지를 팔았다.) 안 매운 고춧가루로 낙지볶음을 해줬다. 어묵탕, 궁중 떡볶이, 삼겹살 구이에 김치볶음. 그녀는 한국의 대표 프랑스인 방송인이었던 '이다도시'처럼 한국 문화를 그대로 받아드릴 수 있는 능력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흡수력이 문제였다. 한국의 음식을 경험했으니 이제는 한국의 음주 문화를 경험할 차례였다. 집에서 파티를 할 때는 대부분 맥주를 마셨다. 시드니에도 소주가 있긴 했지만, 식당에서는 한 병에 20달러가 넘어서 자주 먹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리안 레스토랑에서 소주를 7.5달러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시드니에 한국 주류 협회가 생겼다던가? 어둠의 경로로 소주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던가? 아무렴 어때, 이유는 시드니의 한국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 다시 가격이 올라갈지 모르니 싸게 먹을 수 있을 때 열심히 먹는 수밖에.


셰어하우스에서 맥주로 신나게 홈파티를 하다가 2차로 7.5달러짜리 소주를 마시러 갔다. '크리스텔' 그녀도 한국인 언니들과 함께 발그레한 얼굴로 함께 했다.


"(소주잔을 보며) 오~이 잔 너무 귀엽다!"

"이건 코리안 보드카(Vodka)야. 이 잔에 이렇게 따라서, 첫 잔은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거야."

"짠~~ 응? 엄청 약한데? 달기도 하고.. 이거 먹으면 취해?"

"그래? 그래도 천천히 마셔~~"


소주잔이 작은 이유는 다 이유가 있다. 빠르게 마시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 마셔보는 소주가 달다며 쭉쭉 들이켰다. '역시 와인의 나라 출신답다.'라는 생각을 하며 술을 잘 마시는 그녀가 기특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시간은 15분간 이어졌다. 딱 그만큼이었다. 그녀가 마신 소주는 5~6잔.. 그녀가 갑자기 머리를 테이블에 '쾅' 박았다. 이마를 테이블에 딱 붙이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이어져 들려온 소리. '촤아아악, 우욱, '촤아아악'. 마치 꽉 찬 스펀지를 짜내듯이, 온몸으로 흡수했던 술과 음식들을 방출하는 모습이었다. 테이블 일대 바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룸메이트 언니들은 그녀를 양옆에서 부축해서 데리고 나갔다.


무엇이든 흡수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어떤 상황이든 이겨낼 수 있을 거 같았던 '잔다르크'의 강인함을 가졌던 그녀는 7.5달러 소주에 맥없이 무너졌다. 시드니의 한국 술집에서 세계 최초로 오바이트를 한 프랑스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녀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극심한 숙취와 두통으로 괴로워했지만, 셰어하우스 메이트들은 그녀가 전날 얻은 타이틀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착하고 배려심 넘치는 한국인들인가. 그녀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시드니 생활을 이어갔다.


시간이 꽤 지나고 내가 물었다.


"코리안 보드카 마시러 갈래?"

"으응? 아니야.. 괜찮아.."


그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보았다.

소주 마시러 가자고 했을 때 흔들리던 그녀의 눈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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