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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텔씨 Dec 20. 2024

그녀 2. 한 대만 맞자

인스턴트 사랑에는 박치기가 약이지

 사람들은 도시를 좋아한다. 우리나라 사람만 그런 건 아니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젊은 청춘들은 도시를 좋아하고, 도시의 문화를 사랑한다. 그 문화 속에서 무엇을 즐길 수 있는지 알고, 그것을 위해 불편한 것을 마땅히 감수한다. 그래서 유명한 도시 중심지에서 생활하는 건 돈이 많이 든다. 주거비가 비싸다. 시드니도 마찬가지였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시드니 도심지에서 살기 위한 주거비는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셰어하우스'라는 주거 문화가 있었다.

 

 시드니 중심부의 아파트는 형태는 우리나라의 주상복합시설을 연상케 하는 빌딩이었다. 내부 구조는 우리나라의 아파트와 비슷하게 방이 2~3개, 화장실이 1~2개, 거실과 주방이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수는 한국과 많이 달랐다. 방 3개의 집이면 3~4명이 사는 게 아니라 7~12명이 살았다. 월세(실제로는 2주에 한번 납부하는 2주세)가 너무 높았다.


 시드니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 워킹 홀리데이를 온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생활이 빠듯했다. 빠듯한 사람들만 셰어 하우스에 모였다고 하는 게 맞겠다. 방이 조금 크면 2층 침대가 2개가 들어갔다. 창고도 방으로 꾸며서 방으로 임대했고, 거실에는 싸구려 철제 침대와 누우면 온몸으로 스프링을 느낄 수 있는 매트리스를 놓고 사람을 받았다. 숙박비는 방이 비쌌고, 거실이 제일 쌌다. 때로는 베란다에 2층 침대를 놓고 커튼으로 칸막이를 해놓은 곳도 있었다. '딕'이 그런 곳에 살았다. 침대 2층을 쓰는 아일랜드인 룸메이트가 자꾸 여자친구를 데리고 와서 자기 침대에서 논다고 불평하던 게 생각난다.

 

 셰어 하우스에 모인 사람들은 다 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누군가와 마찰이 생기면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프라이빗한 공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단체에 맞지 않는 성격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아주 작은 사회였다. 칼같이 냉정한 사회.

 반대로 성격이 무난하고, 착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만 남으면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끔찍이도 아꼈다. 금요일이면 몇 명이 Bottle shop(호주는 마트에서 술을 안 팔고, 술만 파는 매장이 따로 있다.)에서 맥주 2~3박스를 사 온 후 파티를 시작했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통합되는 유니버스 파티가 열렸다. 한국, 일본, 프랑스, 독일, 브라질, 콜롬비아에서 온 젊은 남녀들은 하나가 되었다. 나는 올림픽이 금메달을 따기 위한 경쟁의 장이 아니라, 전 세계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즐기는 축제의 장이라는 것을 안다. 각 나라의 문화를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인터넷에 있지 않았고, 정치인들에게 있지 않았다. 셰어 하우스의 카펫 위에서 수시로 글로벌 시대임을 알 수 있었다.


 누나가 한 명 있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모든 말과 행동에 '나 착해. 나 순진해. 나 세상물정 몰라.'라는 게 드러났다. 그래서 항상 좀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셰어하우스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마음이었다.

 그날도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사실 한국인에게는 그냥 늘 있는 술자리인데, 외국 친구들은 항상 'Party tonight?'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은 그녀가 우울해했다. 술이 들어가니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말했다.


 "그 새끼랑 사귀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다른 애랑 손잡고 가더라."


 그 X라고 하는 사람은 같은 영어학원에서 썸 타다가 키스까지 했던 놈이다. 키스까지 해서 누나는 당연히 사귀는 건 줄 알고 있었는데, 그놈은 다른 여자가 있었던 거다. 술이 취하면 공감능력은 극대화된다. 만취해서 호기롭게 이렇게 말했다.


 "아.. 쓰레기 X네. 누나 다음에 내가 손 봐줄게."

 "진짜?"

 "응, 두고 봐."


 호주 시드니에서의 생활에는 비밀이 거의 없다. 특히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는 조금 이상한 일이 있으면 소문이 잘 난다.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학원이 정해져 있고, 많이 사는 아파트나 구역도 정해져 있다. 소주를 파는 술집이 몇 군데 없어서 몇몇 술집을 가면 대부분의 한국인을 마주칠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대학교를 다니는 유학생들은 그나마 조심하는 편인데, 워홀로 와서 1년 미만 머물다 갈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들은 이 여자, 저 여자 찝쩍대고, 여자들은 의지할 곳이 필요한지 마음을 쉽게 열었다. 사실 성인들이 연애를 하는 게 당연한 건데, 한국에서는 눈치를 보느라 조심스럽다고 한다면 호주에서는 다들 너무나 적극적이었다. 한국, 일본, 유럽, 남미..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 똑같았다. (내가 대시받았던 나라만 해도... 한국, 일본, 콜롬비아, 페루, 태국..)


 누나와 키스까지 했던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이 여자 저 여자 다 건드려도 얼굴에 철판만 깔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몇 달 후에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는 마주칠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위법적인 일만 아니면 어느 때보다도 용감한 그들이었다. 그곳에서의 연애는 인스턴트였다. 사랑이라는 포장지를 씌운 애착인형 같았다. 남녀 사이를 영악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놀이터였고, 순박한 누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여기저기 쉽게 연애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X는 쓰레기였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셰어 하우스의 몇몇 사람들과 한국 술집을 갔다. 방장을 맡고 있는 4살 많은 형과 바람맞은 누나가 함께였다. 앞서 말했지만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술집은 정해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맥주나 위스키, 데낄라를 파는 현지 술집들은 12시면 마감을 했지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술집은 새벽 2~3시, 어떤 곳은 아침까지 영업하기도 했다. 한번 마시면 끝장 보는 걸 좋아하는 한국인들 대부분은 새벽시간이 되면 한국 술집에 모였다.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고 있는데, 누나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리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쟤가 걔야."

 "쟤야? 기다려봐 누나."

 "아니야, 하지 마. 뭐 하려고, 하지 마, 하지 마."


 그 자식도 누나를 알아봤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돌아서며 피식 웃는 모습이 보였다. '넌 아무것도 아니었어. 넌 아무것도 못해.'라며 누나를 하찮게 여기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짜증이 났다. 족제비처럼 생긴 모습을 보고 누나도 참 사람 볼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화장실을 가려고 우리가 앉아있는 테이블, 내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내 옆을 지나가는 순간, 나는 발을 뻗었다. 이 정도면 걸려 넘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깊지 않아 휘청거리고 말았다. 속으로 '아깝다'라는 생각과 함께 '쏘리'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병신"

 속에 있던 말이 나지막이 튀어나왔다.


 "뭐라고?"

 그는 누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일부러 시비 거는 걸 눈치챘는지 대담하게 다그쳤다.


 "병신이라고, 너."

 "하.. 이 X끼, 너 나와봐."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온 남자들은 서로를 만만하게 바라본다. 왜냐하면 대부분 말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때 호주에 워홀로 온 남자들 중에 넉넉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살찌고 덩치가 큰 사람을 만나본 적이 거의 없었다. 삐쩍 마른 그를 내가 만만하게 것처럼, 그도 삐쩍 마른 나를 만만하게 봤을 것이다. 술도 취했고, 저 뼈밖에 없어 보이는 주먹에 맞아도 아플 것 같지 않았고, 길바닥 싸움으로 가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 같았다. 그가 나를 잡고 흔들어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를 따라 꽤 많은 사람들이 따라 나왔다. 그의 지인들은 '야야, 그만해'라며 말리려고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호주 기준의 외국인들은 어떤 싸움이 벌어질지 기대하며 요란스럽게 부추겼다. 그와 나는 먼저 때리는 사람에게 귀책사유가 있다는 한국의 법을 호주 땅에서 지키느라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마가 맞닿을 거리까지 붙어서 서로 '쳐봐'라고 외치고 있었다. 솔직히 구경꾼들이 많으니까 부담스럽기도 했고, 둘 사이에 팽팽하게 흘러야 하는 긴장감이 주변 관객들의 소란으로 느슨해졌다.


 그때 내 시야에 누나의 표정이 들어왔다. 누나는 싸우면 어쩌나 걱정하는 듯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안절부절못하는 자세였지만,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입술을 지그시 힘주어 물고 있는 표정은 제발 한대만이라도 때려주라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나는 고개를 대각선 뒤로 젖혔다가 그의 얼굴에 처박았다. 그는 순간 피하려고 했지만 광대를 맞고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깊이 박히진 않았지만 충분히 요란스럽게 뒤로 나자빠졌다. 마침 대로변 건너편에 호주 경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한국인을 포함한 호주에서의 외국인들은 타지에서 경찰들과 엮이면 귀찮아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와 나를 말리던 형은 잽싸게 뒷골목으로 내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숨이 차서 더 달리지 못하는 거리까지 달아났다. 거리는 조용했고, 들리는 건 우리 숨소리뿐이었다. 싸웠지만 싸우지 않은, 때렸지만 전혀 속 시원하지 않은.. 아니.. 때리긴 때린 걸까? 개운하지 않았다. 시시했다. 싸울 명분도 시시했고, 결과도 시시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이에게도 언급되지 않을 에피소드였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도착한 집에 누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말투로 말한다.


 "박치기가 뭐냐? 주먹을 날렸어야지."

 "헤헤, 좀 그랬지?"

 "그래도 그 X 넘어지는 건 웃기더라. 고마워."



 호주 시드니는 참 작은 도시였다. 그렇게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던 그와 나는 길에서 수시로 마주쳤다. 대형 마트에서, 횡단보도 앞에서. 그럴 때면 여전히 서로 만만하게 쳐다보면서 비웃었고,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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