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는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는 사람이 4명 있었다. 물론 더 있었겠지만 지금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나 포함 4명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네이버의 호주 워홀(워킹홀리데이 줄임말) 카페에서 정보를 얻을 순 있었지만 양이 많지 않았고, 부정확한 정보도 많았다. 결국 현장에서 부딪히며 직접 경험하는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이 진리는 아니지만,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겐 여전히 강력하다. 비슷한 시기에 호주 워홀을 가려는 젊은 청년 4명이 의기투합했다. 3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는 호주로 떠나기 며칠 전 카페에서 한번 만났을 뿐, 공항은 두 번째 만남이었다. 호주로 떠나는 순간부터 각자 자리를 잡는 순간까지 서로 도와주기로 했다.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이 뭉쳐서 캥거루의 나라에 도착했다.
지금의 MBTI를 대입해 보면 3명은 'I'였고, 그 혼자 'E'였다. 3명의 'I'는 혼자 떠나기엔 부담스러워하는 성향이기에 파티원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거고, 'E'인 그는 심심해서였다. 그는 큰 키에 작지 않은 눈에 안경을 썼고,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짧은 직모에 스포츠 헤어 스타일이어서 머리가 고슴도치 같았다. 4명의 파티원 중에서 영어를 가장 못했지만, 말에 거침이 없었다. 스스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말할 정도로, 창피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가 영어를 조금만 잘할 수 있었다면 나머지 3명은 영어 없이도 살았을지 모르겠다.
호주에 도착한 지 2주 정도 됐을 때, 중국인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의 여자친구는 하얀 그보다 더 하얀 백옥 같은 피부였고, 긴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단아한 스타일이었다. 그녀의 영어는 완벽했다.(영어권에서 생활한 지 2주 된 내 기준에서) 친구는 그녀와 대화하면서 당황하지는 않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우리 앞에 데려온 것이었다.
"what? 뭐라고? 얘 뭐라고 그런 거야?"
"네가 친절해서 좋다고."
"oh, thank you, thank you. for you, for you."
호주 시드니에서는 어느 정도 비가 와도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다니지 않는다. 비의 오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청정 자연이기도 하고, 인도 위에 건물 처마가 나와있어서 도로에서 비 맞을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내 경험 속의 유럽인들은 비 맞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 카페에서 그녀를 발견한 그는 그녀에게 직진해서 짧은 영어로 연락처를 물어봤지만, 그녀는 자리를 피하려고 했었다. 마침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었고, 그는 그녀를 따라가며 우산을 씌워줬다.(호주에서 누구를 꼬시려면 비가 오는 날에 해라.) 한쪽 어깨를 우산 밖으로 내민 채, 그녀를 우산 속에 폭 담았다. 그의 젖은 어깨가 그녀의 마음을 녹였다. 어깨를 내주고 번호를 얻었다. 지독히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연인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너무나도 쉽게 연인이 되기도 한다. 필요한 양이 그때마다 다른지 모르겠지만, 그와 그녀 사이에 둘이 통하기에 충분한 감정의 스파크가 일어났다. 둘 사이의 전류가 빗물을 만나 그들을 인연으로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그의 영어 실력은 영어를 쓰는 여자친구를 만난다고 해서 빨리 늘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답답할 법도 한데, 생각보다 눈짓, 몸짓, 눈치면 충분했던 거 같다. 오히려 대화 주제에 한계가 명확했기에 다툴 일도 없었다. 대화의 주제는 한정적이었지만, 감정의 표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보여주는 작은 몸짓, 사소한 동작들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낫다.'라는 속담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에서 나온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대화가 잘 안 돼서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전자사전을 들고 다니며 그녀와 대화할 때마다 확인했다.(전자사전을 잘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설명하자면, 작은 태블릿 PC 같은 것인데, 그 안에 영어 사전이 있는 기기다.) 그녀가 어디서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고 얘기를 해도, 그가 몇 번씩이나 잘못 알아듣고 약속이 어긋나곤 했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었고, 돈을 아껴야 하는 '워홀러'는 선불 요금제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화통화를 자주 할 수 없었고, 전화로 하는 대화는 눈치껏이 되지 않아 못 알아듣는 그였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전자사전을 들고 다녔고, 우리는 그를 '딕(dictionary에서 따왔다.)'이라고 불렀다. '딕'이라는 이름은 영어로는 매우 이상한 이름이었지만, 그는 싫어하지 않았다. 그가 여자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고, 그는 그게 같은 발음의 이상한 단어라는 걸 몰랐으니까.
그들을 통해 쉽게 시작된 인연이라고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일순간의 빗물을 타고 전해진 스파크로 시작한 연애는 8개월 동안 이어졌다. 그는 호주에서의 생활이 좋아서 1년 연장을 하기 위해 농장으로 떠났다. 300만 원짜리 중고차를 사서 떠나는 날, 그녀는 잠시동안 눈물을 흘렸다. 공항에서 나를 보내던 그녀가 흘린 눈물도 같은 경로를 통해 발생한 비슷한 염도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그가 말했다. 한국말로. 그의 마음을 한글로 전한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 어떤 영어를 건네야 하는지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지난 8개월 동안 수도 없이 건넸을 '괜찮아'였다.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괜찮게 했다.
'가지 마.'
'괜찮아, 괜찮아.'
'다시 돌아와.'
'괜찮아, 괜찮아.'
'사랑해.'
'괜찮아, 괜찮아.'
그는 애써 심각하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이나 몇 달 후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비자 연장하고 돌아와서 만나면 되지 않냐는 우리의 질문에 머뭇머뭇했다. 그와 그녀의 미래가 궁금하긴 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이런 헤어짐의 끝은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돈을 모아서 산 중고 승합차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한국에 있는 나의 그녀와(이때는 나의 그녀였을지 누군가의 그녀였을지 알 방법이 없었다.) 1,400 km 가까워지는 곳에 도착했다.
우리의 농장 생활은 한국에서 바라보는 '외국인 노동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새벽부터 낮까지 농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고, 3개월이라는 시간을 채우는 것에 집중했다. (3개월간 농장에서 일을 해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1년 연장할 수 있었다.) 농장 일은 새벽에 시작해서 낮이면 끝났다. 수입은 꽤 괜찮았다. 4명이서 함께 생활하니까 숙박비나 생활비도 아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재밌었다. 영어 공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연 친화적인 나라의 자연과 친할 수밖에 없는 마을에서(농장은 시골에 있었다.) 일생에서 다시는 못 누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호주는 지역별로 생산되는 와인이 정말 맛있었다. 대량생산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 지역에서만 유통되고 소비하는 와인이라 정말 좋은 맛과 품질인데 가격은 저렴했다. 우리는 매일 와인 파티였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 하는 이야기는 정해져 있다. 남자, 여자, 이성, 사랑 이야기.
"워홀 비자 연장하면 그녀 만나러 안 갈 거야?"
"지난주에 중국으로 돌아갔어."
그랬다. 그와 그녀는 이미 확실한 결말을 갖고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만남이라는 운명을 맡겨놓은 것이 아니었다. 농장으로 떠나는 날, 그는 그녀와 이별했다.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은 그녀에게 하는 말이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한국말로 했던 게 이해됐고 참으로 적절했다.
그녀는 홍콩의 유명한 방송국 사장의 외동딸이었고, 호주에서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때가 농장에 온 지 두 달 되던 때였다. 그들은 쉽게 이별할 운명이었다. 둘 중 누구도 '헤어지자'라는 잔인한 말을 꺼낼 필요 없이 말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괜찮았을 거다. 정말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