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이 문제겠어? 사람이 문제지.
"일본 여자 믿지 마, 다 거짓말쟁이들이야."
일본인이었던 그가 나에게 해준 말 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유일한 말이다. 그를 만난 건 농장에서 지낼 때였다.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이 있었지만 일본인 친구는 없었다. 정확히 일본인 친구 중에 남자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신기한 일이었다. 일본인 여자 친구들은 좀 있었는데, 남자들은 없었다. 셰어하우스에 일본인 여자 한 명, 영어 학원에서 같은 반이었던 일본인 여자 두 명이 기억나는데, 일본인 남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셰어하우스의 집주인은 한국인 형이었고, 일본 남자라면 한국인 형이 집주인인 곳에 굳이 들어오지 않으려 했을 테니 그랬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결론은 일본인 남자 친구는 농장에서 만난 그가 유일했다는 것이다.
농장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새벽 6시면 농장으로 나가 일을 했고, 오후 3시면 마치고 돌아왔다. 그 시간부터는 휴식 시간이었다. 농장 생활은 재밌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었고, 혹여나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풀 수 있는 방법이 많았다. 일이 끝나면 동네에 사는 한국인을 포함한 호주 기준의 외국인 노동자들과 축구를 하거나, 친해진 사람들과 바비큐를 하고 술을 마시며 자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내륙 지방이었던 그 당시의 호주 시골에서는 축구를 하고, 술을 마시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한두 달에 한번 정도 우리나라의 유랑 서커스단처럼 마을 공터에 서커스단이 오고, 작은 놀이공원을 설치해서 마을 사람들(어린이들)이 즐기는 축제도 있었다.
그와는 축구를 하면서 친해졌다. 농장 주변에 사는 20대 남자들은 일이 끝나면 마을의 천연 잔디 구장으로 모였다. 핸드폰 번호를 서로 알 필요도 없었다. 비가 오지 않는 이상 공 좀 차본 적이 있다는 남자들은 운동장에 모였다.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축구를 하고 나면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되어 있었다. 하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고, 넘어져도 다칠 일 없는 천연잔디에, 20대 남자들은 땀을 흠뻑 흘리며 몸을 부대끼며 피부색과 문화를 뛰어넘는 우정을 키우고 있었다. 공을 한 번이라도 함께 찼으면 동네에서 마주칠 때마다 웃으며 인사하고, 서로 숙소에 초대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일본인 답지 않았다. 일본인 다운게 어떤 거라고 정의 내릴 수 없지만, 나의 선입견으로는 일본인은 보통 초대에 쑥스러워한다거나, 몇 번의 거절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일본 문화를 단편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만 접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호탕했다.
"이따 저녁에 뭐 해? 축구 끝나고 맥주 마시러 와."
"그래? 나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가도 돼?"
"그럼."
그는 농장에서 혼자 생활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월세를 아끼고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 여럿이서 단체 생활을 선호했다. 시드니나 브리즈번 같은 큰 도시에서 생활하려면 돈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워홀러들은 셰어하우스 경험이 있다. 그리고 셰어하우스의 경험이 농장에서도 이어지는 듯했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여럿이서 사는 게 국룰이었는다. 하지만 일본인인 그는 혼자였다.
"너는 왜 혼자 살아?"
"혼자가 편해."
외모로는 나보다 조금 형인 거 같았지만 우리는 영어로 대화했기 때문에 형, 동생을 중시하는 아시아 문화권임에도 그냥 친구처럼 지냈다. 180이 살짝 넘는 키에 꽤 오래 농장생활을 한 듯한 까무잡잡한 피부, 호주에서의 많은 남자들처럼 마른 체형의 그는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야기도 잘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농장에서 일하고, 일이 끝나면 축구를 하고, 자연을 즐기고 맥주 한잔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생활에 충실했다. 고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어서 인상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절제력이 좋아서 술을 과하게 마시지 않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든든한 삼촌 같은 느낌이었다.
"농장에서 얼마큼 있을 거야?"
"1년."
"그렇게 오래 있어서 뭐 하려고?"
"농장에서 일하면서 생활하는 게 그냥 좋아."
나도 그랬다.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3개월만 농장에서 일을 하자며 왔지만, 이곳 생활이 너무나 좋았다. 하루하루가 여행 같았다. 즐길 게 별로 없다고는 했지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게 너무나도 행복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끝마쳐야 할 학업이 있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머물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그의 생각에 공감했다.
그는 일단 돈을 모아서 여행을 다니는 게 목표라고 했다. 여기서 비자가 끝나면 동남아로 가고, 거기서도 일하면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언제까지 그럴 건데?"
"글쎄.. 정하진 않았는데?"
"나중에 결혼도 하고 그래야지 않겠어?"
.
.
"갔다 왔어."
"에?"
그랬다. 그는 결혼을 벌써 해본 적이 있었다. 현재 그의 나이는 만으로 30이었고, 일본에서 일본인 여자와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하고 호주로 온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라 무의식적으로 연달아 질문이 나왔다.
"왜? 왜 이혼했어?"
".. 일본 여자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그녀들을 절대로 믿지 마."
개인적인 이야기를 물어보기도 그렇고, 그 이유가 그렇게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일본 여자들을 믿지 말라는 그의 한마디가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었다. 해외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눈길이 가기 마련인데, 그는 농장 주변 마을에서 일본인 국적의 여자들을 마주치더라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일본인 여자들을 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여자들에게 다정다감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주변의 한국인이나 태국인 등의 동양 여자들이나 유럽의 여자들과는 친하게 지냈다. 일본인 여자들을 제외하곤 넉살 좋고, 장난기 많은 동네 오빠, 동네 형이었다.
그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알 방법은 없었다. 그냥 추측만 해볼 뿐이었다. 결혼했던 아내가 바람이 났었을까? 사기결혼을 당한 걸까? 오랫동안 믿어왔던 사람에게 배신이라도 당했을까? 나라고 한국 여자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바람난 여자도 있었고,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여자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한국 여자들 모두를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내가 운이 나빴던 거야, 여복이 없었던 거야, 세상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반대로 좋은 사람들도 있을 거야.'라며 희망을 안고 살았다. 1년이 다 돼 가도록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 한국의 그녀였지만, 버림받았거나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던 걸까? 그는 일본 여자에게는 아무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배신감을 겪었던 것일까?
머물던 마을에서 사기 사건이 일어났다. 파키스탄 남자와 한국인 여자 커플이 범인이었다. 파키스탄 남자는 돈을 잘 벌 수 있는 토마토 농장의 관리자였다. 농장은 시급제로 일하는 경우가 있고, 얼마나 많이 따느냐에 따라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능력제가 있었다. 파키스탄인과 커플인 한국인 여자는 서글서글한 성격과 친화력으로 한국인들에게 접근했다. 일자리를 구하는 한국인들에게 남자친구가 농장 관리자이니 소개비를 주면 일자리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소개비는 100달러에서 300달러 정도. 이 얘기가 농장에 알려지면 안 된다며 절대 비밀이라고 입단속을 시켰고, 2주 동안 수십 명이 그녀에게 소개비를 줬다. 사람들은 일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제 농장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녀에게 수십만 원을 줬다. 그 농장의 하루 일당 수준이어서 일만 하게 된다면 훨씬 이득이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파키스탄 남자친구와 함께 주말 새벽 야반도주 했다. 호주에서 가장 위험한 국적은 갱단이 있는 레바논이나 중국인이 아니었다. 가장 위험한 건 한국인이었다. 시드니에서 생활할 때도 한국인들 등쳐먹는 사람은 한국인 뿐이었다. 야반도주한 그녀에게 당한 사람들이 분노를 토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믿어선 안된다'라고 했던 일본 여자와 '야반도주' 한 한국 여자 중에 누구를 더 믿으면 안 될까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같이 축구를 하며 친해진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사기를 당하고 괘씸해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믿지 말아야 할 여자 목록에 한국 여자도 추가가 되었을까?
농장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그는 떠났다. 그리고 몇 년 후 Facebook을 통해 그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종착지는 태국이었다. 수줍은 미소를 띤 신부와 함께 밝게 웃고 있는 그의 사진이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그의 내가 아는 첫 번째 결혼식을 축하해 줬다. 그에게 태국인 여자는 믿을 수 있는 여자로 남기를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