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이사악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받아들임: 달라고 하면 주어라

by 티나부

야곱이 집을 떠나 하란에서 겪게 되는 일들은 마치 야곱의 거울치료 같이 느껴졌다. 나는 요즘 누군가의 모습에서 과거에 나의 안 좋은 모습을 보게 된다. 타인으로 인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반성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거울치료'를 받는 기분이다.

야곱은 하란에서 그러한 '거울치료'를 받게 된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야곱의 아버지인 이사악이 이방인으로 타지에서 겪게 되는 사건들과 그 속에서 이사악이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이사악과 아비멜렉


기근이 들어 이사악은 그라르로 팔리스티아 임금 아비멜렉에게 갔다.


주님께서 이사악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땅에 자리 잡아라. 너는 이 땅에서 나그네살이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너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고,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루어 주겠다.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불어나게 하고,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겠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 나의 규정과 나의 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사악은 그라르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 사내들이 자기 아내에 대하여 묻자, 이사악은 "내 누이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레베카가 예뻐서 이곳 사내들이 레베카 때문에 나을 주일지도 모르지."하고 생각하였기에, "내 아내오."하고 말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창세기 26장 2절~7절)


하느님은 이사악에게 이집트로 가지 말고 그라르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라고 명령하였고 그것을 따르면 복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이유가 신에게 순종하고 계명을 지키고 신의 규정과 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하여 이사악은 그라르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사악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아내 레베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사악은 하느님께 순종하며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신의 말씀을 따른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기근이 든 시기에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이민진 작가의 '파칭코'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의 재일교포들이 생각이 났다. 이방인의 삶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비멜렉은 히브리어로 '나의 아버지는 왕'이란 뜻을 가지며 왕들의 공통 이름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임금 아비멜렉이 레베카가 이사악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 아바멜렉의 모든 백성들에게 "이 남자와 이 여자를 건드리는 자는 사형을 받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아비멜렉은 "그대는 어쩌자고 우리에게 이런 일을 저질렀고? 하마터면 백성 가운데 누군가 그대 아내와 동침하여, 우리를 죄에 빠뜨릴 뻔하지 않았고?"라고 이사악에게 말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사악은 분명 약속의 땅에서 가족과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꿈꿨으리라. 그러기 위해선 우선 살아야 했다. 그는 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노력 했다.



이사악의 우물


이사악은 씨를 뿌리면 수확량이 백 배나 올랐고 양 떼와 소 떼와 많은 하인을 거느리는 부자가 되었다. 필리스타인인들은 이사악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종들이 판 우물을 모두 막고 흙으로 메워 버렸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이사악에게 떠나 달라고 한다.


아비멜렉이 이사악에게 말하였다. "이제 그대가 우리보다 훨씬 강해졌으니, 우리를 떠나 주시오." (창세기 26장 16절)


이사악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라르 골짜기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 시대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 그것들은 아브라함이 죽은 뒤에 필리스타이인들이 막어버린 우물들이었다.


우물을 파는 이삭, 성경 상상 삽화 (1900년경)


얄궂게도 이사악이 생수가 솟는 우물을 발견하면 그라르의 목자들이 그물을 자기네 것이라고 하면서 시비를 걸었다. 그러면 이사악은 어떻게 했을까?

이사악은 시비 붙은 그 우물을 그라르 목자들에게 줘버리고 다른 우물을 또 팠다.

그리고 그라르 목자들은 그 우물 역시 자기들 것이라고 시비를 걸었다. 이사악은 그라르 목자들에게 그 우물 역시 줘버리고 다른 우물을 또 판다.

이사악은 자리를 옮겨 우물을 팠고 그제서야 그라르 목자들은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아마도 그라르 목자들은 이사악의 우물로 인해 필요한 물을 모두 확보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이 이야기에서 난 마태오 복음서 5장 38절 이야기가 떠올랐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오 복음서 5장 38절~42절)


이 이야기는 마태오가 기록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 중 일부이다.

예수님은 앙심을 품고 복수하지 말라고 하셨다. 달라는 자에게 주어야 그가 강재로 빼앗아 죄를 짓지 않고 나도 자의로 주었기 때문에 억울하지 않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자비와 매우 비슷하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우물을 이사악이 다시 팠고 그 우물로 인해 시비가 걸려 싸움이 나자 우물을 빼앗긴 것인지 줘버린 것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래서 이사악이 그의 종들을 시켜 다시 다른 곳을 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성경에는 이 일로 이사악이 울었다거나 슬퍼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는 것을 미루어 그냥 줘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사악은 모든 사건들에 대해 매우 수용적인 자세로 문제를 해결했다. 문제를 저항 없이 수용했기 때문에 이사악에게는 그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게했.


이사악의 문제 해결 방식은 받아들임과 허용이었다.


받아들임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이것은 불교의 '중도'와 매우 유사하다. 현실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허용하는 것, 그리고 자비... 연기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나로 인한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허용하고 받아들인다... 자비롭게...


21장은 앞에서 언급한 야곱이 하란에서 겪게되는 거울치료에 대한 이야기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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