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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뽀얀 아기 앨범

가족을, 새로이 만나는 청년

by 봄아범

부모님은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셨다. 내가 초등학생 때 샀던 다이아몬드 전집은 지금도 책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병풍은 먼지와 함께 장롱 위에 잠들어있다. 나였으면 8할 정도는 재활용함에 들어갈 물건들. 그럼에도, 뽀얀 먼지를 털어내고 종종 들추는 책이 있다. 나와 동생의 아기 앨범. 그중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나와 동생이 낮잠을 자는 순간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동생의 옆에 눈을 감고 있는 나. 동생을 출산한 산부인과 이름이 프린팅 된 베갯잇. 무엇보다, 그 순간을 남기고 싶어서 셔터를 눌렀을 어머니의 시선. 기억도 나지 않는 그때의 가족이 그려져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났다. 지현이 백일 때. 지현이가 처음 서울랜드에 간 날. 어머니의 꾹꾹 눌러쓴 글씨를 바라보았다. 쟁여놓지 않고 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접었다. 나도 아이에게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을까.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나요?”


15일 남짓. 그동안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담센터장님은 그 이유를 궁금해하셨다. 결혼 5년 차이자 육아 3년 차. 울컥하는 화를 어쩌질 못해 아내와 아이가 힘들어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도 자신의 변화가 궁금했다. 글쓰기의 힘이 나를 치유했다. 상담이 끝나자마자 돌아가는 길에 대화를 복기했다. 아내에게 공유하며 나의 마음에 새겼다. 내가 울컥했던 순간을 기록했다. 감정의 뿌리에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매를 맞으면서 자랐던 초등학생의 나. 부모님을 밀쳤던 중학생의 나. 돈이 없어서 학원도 못 가냐며 소리를 지른 고등학생의 나. 말로 벌어먹고 살면서 부모와의 대화는 없는 아나운서인 나. 울컥했던 감정이 가라앉으니까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이 남았다. 부족한 형편이었지만, 밥 한 번 굶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재기하려고 사방팔방을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가족의 건강을 지향으로 매일 기도와 봉사를 했다. 글을 쓴 덕분에, 나를 때린 부모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 되었다. 문장이 가진 힘 덕분에, 받은 사랑을 온전히 내려줄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사랑을 몸소 보여주는 아내의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조회수가 30,000을 돌파했습니다!


작년 3월, 생각지도 못한 푸시 알림을 받고, 아내에게 제일 먼저 공유했다. 아내의 마음을 녹인 브런치 글의 조회수였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의 출장을 준비했다. 캐리어 속의 짐보다 중요한 게 아이의 끼니였다. 출국 전날. 밤을 새워 준비한 봄(태명)의 식단표가 냉장고에 붙었다. 경이로웠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탄단지를 고려한 식단보다 탄탄한 마음이 존경스러웠다.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 아내의 마음을 배웠다. 그 문장은 만 명을 넘어, 이만 명을 넘어, 삼만 명의 마음을 움직였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바꿨다. 사람이 이기적이라면, 사랑해야 할 또 다른 내가 늘어나는 게 인생이라는 것. 그 밑바탕이 가족이라는 것을 배웠다.

전체 조회수 31,645 (25.9.10 기준) 나도 모르는 새에 포털 메인에 걸렸을 거라고 생각한 글인 '내 아내의 식단표'. 2024년 4월 1일, 2일에 조회수가 폭발했다.


봄이 태어난 지 200일 남짓한 날 밤. 우는 아이를 달래다 화를 내버렸다. 지쳐서 거실에 앉아있는 나에게 아내가 말을 건넸다. 좋은 부모가 되자. 아기가 형님이 된 생후 1246일째인 오늘. 나와 여동생의 성장기를 어여쁘게 바라본 어머니의 눈을 생각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노력의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 그 여정에 브런치로 남기는 나의 기록이 든든한 토양이 될 거라 믿는다.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미소 지으며 바라볼 수 있게 된 뽀얗게 먼지가 쌓인 하얀 아기앨범처럼. 30년이 지나고, 봄이 지금의 글을 읽으며 미소와 눈물을 지을 날을 그린다. 오늘도 노트북 앞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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