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누구나 비밀은 있다. 나는 가난을 숨기고 싶었다. 반지하의 퀴퀴한 향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학생증에 쓰여 있는 주소 ‘지층 B01호’를 친구들에게 들켰다.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은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경제적으로 부족해도, 반장은 반장이었다. 선생님의 말을 전하고, 자습 시간에 떠든 친구들을 칠판에 적었다. 따돌림을 당했다. 반지하에 사는 주제에 잘난 체를 한다는 이유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작문 시간에 자서전을 쓰는 수행평가를 부여받았다. 우선 내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긴 앞머리로 눈을 가린 얼굴이 종이에 남았다. 10대들의 우상인 5인조 아이돌의 멤버가 유행시킨 머리였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말을 들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학원비뿐만 아니라, 학교 등록금도 내기 빠듯한 현실을 마주하기 싫었다. 학교를 다니기 어렵다고 선생님에게 고백했다. 은사의 도움으로 시에서 선정한 장학생이 되었다. 나의 부족함을 알게 된 것에 선생님은 오히려 고마워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해줘서 고맙다며.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며 담임은 나에게 당부했다.
솔직하게 살아라.
네가 먼저 한 걸음 다가가면,
상대방은 두 걸음 다가올 거야.
한 잔을 더 마셨는지, 한 병을 더 마셨는지 알 길이 없었다. 대학생이 되고 교내 방송국의 신입 국원 환영회가 열렸다. 53기이자 스무 살인 내 옆에는 25기이자 인생 선배 H가 앉아 있었다. 당시, 흔하게 하는 정식 인사를 쩌렁쩌렁 외치고 500ml 잔에 소주를 섞은 맥주를 가득 받았다. 술이라고는 맥주 한 병 마셔본 것이 전부였다. 갈증이 날 때 물을 마시듯이 벌컥, 벌컥 들이켰다. 다른 테이블의 선배에게 인사를 했다. 그 순간부터는 술이 나를 마셨다. 화장실에서 몇 번을 게워냈을까. 자리에 앉으니까, 첫 테이블의 H 옆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대학에 오기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이제는 입이 아니라 눈에서 뜨거운 게 흘러나왔다.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선 사람에게 내 아픈 과거를 드러냈다. 후회는 없었다. 아무리 술기운이었어도, 먼저 다가갔다고 생각했다. 예상과 다르게, 다른 국원들은 가만히 있거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선배들은 내가 왜 울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환영회에서 술에 진탕이 되어 울어버린 후배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뿐이다. 동기들은 내가 힘들어 보인다며 일부러 술자리를 만들었다. 엉겁결에, 어려웠던 과거와 지금을 고백했다. 모임을 마무리하는 끝에, C가 물었다. 이제 후련하냐고. 가슴이 더 답답했다. 내가 원해서 한 말들이 아니었다. 갑갑한 속을 풀어내는 마음으로 마지막 잔을 비웠다.
등을 떠밀리듯이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친구들을 불렀으면 어땠을까. 주도적으로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면 속이 시원했을까. 따돌림의 이유를 소문으로만 듣고 움츠러들 것이 아니라, 직접 물어봤으면 어땠을까. 주먹다짐이 되더라도, 마음이 개운했을까. 고등학생 때 앞머리를 걷어낸 큰 눈을 그릴 수 있었을까. 20년 가까이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먼저 솔직한 이야기를 당신에게 꺼낸다. 소심하고, 지질하고, 울컥하고, 후회하고, 다시 지질해진 지난날을 고백하려 한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치인 끝에 깨달은 것을 문장으로 옮긴다. 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자, 한 여인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로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간다. 여전히, 가족이 건강한 뿌리가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기억하며. 문장으로 전하는 한 걸음에 두 걸음 다가오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나의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순간에 웃고, 울고, 따뜻해지시길. 무엇보다,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