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새로이 만나는 청년
유독 짧게 느껴지는 시간이 있다. 출근길 지하철을 혼자 타면 20분이 30분으로 느껴진다. 우연히 반가운 친구를 만나면 5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도착역에 가까워져 있다. 내가 거쳐 간 군생활의 시계는 유난히 느렸지만, 친구는 세 번째 휴가인 것 같은데 곧 제대를 한다고 말한다. 육아도 그렇다. SNS로 출산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금방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피드가 올라온다. 봄(태명)의 성장 속도는 더 빨랐다. 신생아 때부터 자주 기지개를 켜면서 울었다. 자신의 작은 몸이 갑갑하다는 외침으로 느껴졌다. 낮잠만 잤을 뿐인데, 팔과 다리가 늘어난 것 같았다. 통통했던 배가 홀쭉해지면서, 몸은 길쭉해지는 성장이 신기했다. 할 줄 아는 단어도 늘어났다. 어린이집에 다닌 지 5개월쯤 지났을까. 아기를 형님으로 키우는 마법의 단어를 외치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말은 행동을 낳는다. 아이가 직접 할 줄 아는 것들이 늘어났다. 들어오자마자 직접 누르는 거실과 화장실의 스위치. 수전을 올리는 손길과 힘찬 물비누의 펌프질. 옷의 팔 부분을 말아 올려 머리 위로 상의를 벗어버리는 조막만 한 손.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인 것을 알기에, 야무진 손짓과 발짓에 아빠인 나는 더욱 힘차게 박수를 쳤다.
유독 긴 연휴였다. 그렇다고 온전히 쉬지도 못했다. 휴일 출근과 육아. 차량에서의 시간과 밖에서의 취침. 빨래통에 가득 쌓여가는 빨래. 8박 9일의 황금연휴가 나에게는 마냥 번쩍거리는 시간은 아니었다. 연휴를 마무리하는 일요일 밤. 아이와 아내가 안방 침대에서 잠든 덕분에, 아이의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추석이 끝나니까 기온이 떨어졌다. 내려간 기온만큼 이불을 끌어올리기는 어려웠다. 아기용 이불은 배를 가리면 발이 추웠다. 발을 가리면 배가 시렸다.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동이 텄다. 그래도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영혼을 침대에 둔 채 몸을 욕조로 이끌었다. 샤워기 소리가 컸던 탓일까. 중간, 중간 나오는 큰 한숨에 눈을 뜬 걸까. 아내가 일어났다. 나와 가볍게 인사하고, 화장실 사용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봄도 고된 한 주 였으리라. 엄마의 부재를 느낀 아기는 눈을 감은 채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엄마는 어디 있지?”
“어디로 가기는. 씻으러 갔어.”
아이에게 건네는 말투가 생각보다 퉁명스러웠다. 기분을 애써 감추며 드라이기를 작동시켰다. 이왕 눈을 뜬 아이가 생활 소음으로 일어나도 되겠다 싶은 마음에 가르마를 잡고, 머리를 말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아내가 상황을 모른 채 나왔다. 그녀가 아이에게 물었다.
“아빠 머리 말리는 소리에 봄이가 깼구나?”
그럴 리가.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상대방이 베일 정도로 날이 선 말투였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나에게 향한 질문도 아니었다. 안방의 공기는 그날 최저기온보다 더 아래로 떨어졌다.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어린이집 등원 전에 아이에게 아침을 먹이는 아내 앞에 섰다. 평소에 나에게 해 주는 말을 꺼냈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라고 했는데, 예민해서 미안해. 연휴가 너무 힘들었나 봐.”
“사과해 줘서 고마워.”
두 사람의 대화가 봄의 쟁쟁거리는 소리에 묻힌다.
나한테도! 나한테도 예민했어!
나한테도 사과해!
웃음이 나온다. 미소는 이내 미안함으로 번진다. 처음 ‘내가!’를 외치는 아이에게 박수를 쳤던 마음은 쉽게 건조해졌다. 직접 손을 씻는 것이 일상이 되니까, 물비누 펌프질을 여러 번 하는 것에 눈총을 주었다. 봄의 성장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니까, 칭찬보다 지시의 말이 앞섰다. 급기야, 엄마를 찾는 아이를 남처럼 대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어버린 ‘내가!’라는 말을 마음으로 담는다. 옷 입기와 벗기를 처음 해냈을 때 환희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봄의 분명한 의사표현이 감사하다. 건강함에 고마움을 더해 생후 43개월 형님을 향해 허리를 숙인다.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