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새로이 만나는 청년
버스의 맨 뒷 좌석을 선호한다. 살짝 높은 곳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듯한 시야.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 익스트림 스포츠를 방불케 하는 충격. 차 뒤에 있는 엔진 덕분에 뜨뜻해지는 엉덩이. 학생 때, 소위 잘 나가는 친구들에게 항상 양보를 했던 천추의 한. 때문에, 지선버스부터 간선버스까지. 웬만하면 끄트머리에서 탑승을 즐겼다. 한풀이를 하듯이 하원길의 간선버스에서 꾸역꾸역 뒷줄로 향했다. 여느 때와 같이 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글을 썼다. 졸음이 쏟아지던 오후 4시 40분.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분이 내 왼쪽이자 제일 구석 자리에 착석을 시도했다. 편하게 지나가시라는 마음으로 발 앞꿈치를 들어서 한껏 뒤로 붙였다. 자연스럽게 무릎이 들렸다. 그가 조심스레 내 앞을 지나가려는 찰나, 버스가 급출발했다. 관성의 법칙을 이기지 못한 그가 내 위에 앉았다. 정확히는 내 무릎과 그의 둔부가 격하게 만났다. 물컹. 친절하려던 나도, 조심하려던 그도. 얼굴빛이 4시 50분의 노을이 되었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황급히 하차 단말기 앞으로 갔다. 도착지를 한창 앞두고 있었지만, 카드를 태그 하며 알림음으로 혼잣말을 가렸다.
과했다. 친절이 과했다. 과했어.
친절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빚을 지고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과외부터 서빙까지. 급식 도우미부터 대학교 근로 장학생까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했다. 대부분의 점심은 학교 본관의 탕비실에서 해결했다. 한국장학재단에서 주는 돈으로는 빠듯했으니까. 햇반이 전자레인지에서 데워지는 시간은 2분 30초. 타이머의 숫자가 줄어드는 속도만큼, 잔고도 쉽게 바닥이 났다. 팍팍했지만, 갓 나온 밥을 소중히 꺼내듯이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했다. 이상하게도, 그 이상으로 가족에게는 딱딱했다. 생활비를 직접 벌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등록금은커녕 용돈도 주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나 또한 손을 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무 살, 성인이니까. 몸만 자란 소년은 얄팍한 책임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마음 밑바닥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부모를 향한 원망이 있는지도 몰랐다. 하루에 두 끼, 또는 세끼를 얻어먹을 수 있는 감사도 느끼지 못했다. 자연히 가족과의 대화는 잦아들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나는 부모님에게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집안의 적막함을 드라마의 대사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내 방에서 울려 퍼지는 ‘연애시대’와 ‘네 멋대로 해라’. 거실에서 넘어오는 ‘용의 눈물’과 ‘태조 왕건’. 각자가 보고 싶은 콘텐츠를 백색 소음으로 틀어놓으며 같은 생각을 했다. 무슨 대화를 하나. 나보다 더 힘들 텐데. 그냥 드라마나 보자. 지금이 편하다. 말이라도 붙이면, 분명히 불편할 거다.
너희가 불편할까 봐.
수화기 너머 장모님인 S의 미안함이 들렸다. 아내와 나는 장인어른의 허리 시술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걷다가 쉬어야 할 정도로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검사차 찾은 진료에서 바로 시술을 받은 것이다. 시술임에도 큰 치료였다. 더 악화되기 전의 골든 타임을 지킨 것일까. 수술까지 가지 않은 것이 감사했다. 다만, 가족이 안심하고 이해하는 시간은 훨씬 넘겼다. S는 진료 결과를 들을 때에도. 시술을 하기 전에도. 시술을 한 후에도. 아내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직장 다니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싶어서였다.
장모님. 불편하니까 가족이에요.
당부로 통화를 마무리하며, 가족끼리는 비밀이 있어야 평화롭다고 여겼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봐 아르바이트 중에 들은 ‘넌 군대를 안 갔다 와서 일을 못한다.’는 폭언을 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염려할 게 뻔하니 급식 잔반을 치우면서 헛구역질을 여러 번 했던 일을 나누지 않았다. 편할 줄 알았는데, 마음에 알 수 없는 것이 쌓였다. 부모님과 대화의 골든타임을 한참 넘긴 마흔 즈음의 남성이 보였다. 불편을 최대한 줄이려는 행동은 낯선 남성과의 원치 않는 스킨십을 만들었다. 불편해도 되는 가족에게조차 신세를 지지 않으려 애썼다. 피해를 주지 않으려 일부러 두었던 거리를 좁힌다. 발신 기록의 꽤 아래에 있는 전화번호를 찾는다. 어머니. 아버지. 통화 버튼을 누른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저예요. 식사는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