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모델을 찾지도 못하고, 롤모델이 되지도 못한
얼마 전 어느 기사에서 보니, 대기업의 신입사원들의 퇴사율이 예전과 다르게 급격히 늘어간다더라. 어려운 취업 경쟁을 뚫고 입사했으나, 1~2년 차에 퇴사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내 눈에 쏙 들어온 것은 '롤모델의 부재'였다.
운이 좋게도 X세대로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20대 초중반을 보내고, 치열한 취업 준비에 전념하기보다는(예를 들면 대기업 입사를 위한 여러 가지 시험에 좁고 깊게 대비), 나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겠다며 얕고 넓게 각종 분야를 훑어보다가, 운 좋게 어느 개인 회사에 들어갔고, 다시 운 좋게 개인이 경영하는 영화사로 이직했다가, 진짜 운 좋게 대기업 영화사로 이직해 15년을 근무했다.
10명 남짓의 직원들이 속한 아담한 조직에서 100여 명을 훌쩍 넘는 큰 조직으로 소속이 바뀌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더 넓은 세상을 접하게 된 것은 사실이나, 내 그릇이 그에 따라 확장하지는 못한 듯싶다. 거기엔 다양한 이유가 있겠으나, 일차적인 원인은 물론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며, 큰 조직 안에서 내가 닮고 싶고 따라가고 싶은 롤 모델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에게 롤 모델이 되지도 못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제 얼굴에 침 뱉기이다.
요즘 주말에는 JTBC 토일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보는 재미가 푹 빠져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 속 김 부장만큼의 업적도 세우지 못한 채 도태된 나 자신을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거기에 또 하나의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는 영업 1팀 팀장인 김 부장의 대척점에 있는 영업 2팀 팀장 도 부장과의 비교인데, 너른 의미에서 김 부장 스타일과 도 부장 스타일을 모두 겪고 보고 들은 터라, 이 부분에서 나 자신은 관전자로 빼 두고, 상반되는 두 스타일의 상사를 비교하는 이른바 '내로남불'식 사고방식이 작동한다.
어느 소셜 미디어에서, 김 부장과 도 부장 중 어떤 상사를 선호하는지 누군가가 질문을 던지자, 다양한 의견들이 댓글에 달렸다.
김 부장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보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의 속마음, 그가 가족과 겪는 갈등을 보았고, 아무래도 김 부장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배제하고 회사에서만 보는 직속 상사로 전제했을 때, 나는 김 부장 쪽을 선호하지 않는다.
팀원들과 스스럼없이 가위바위보를 하며 커피 내기를 하고, 딱 봐도 팀원들이 똘똘 뭉쳐 팀장을 따르는 영업 2팀의 분위기만 보자면, 도 부장은 리더십을 갖추고 팀원들을 이끄는 똑 부러지는 리더로 보인다. 반면, 김 부장이 팀장인 영업 2팀은 팀원 각자의 능력이야 출중하겠으나, 팀장만 제외한 팀원들 사이는 나름 돈독해 보이나, 김 부장의 '꼰대' 근성에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는 게 보인다.
그렇다면, 도 부장 스타일을 리더로 만나는 게 당장에는 더 좋아 보이겠다. 전체 조직 내에서의 위상도 김 부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 보이고(백 상무와의 접촉이 현저히 많고, 심지어 백 상무가 김 부장에 대한 아쉬움을 도 부장에게 토로할 정도이니), 팀원들도 잘 이끌며 실적도 좋으니, 아무래도 영업 1팀보다는 2팀에 소속된 팀원들이 더 안락함과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을 우선적인 가치로 여기는 습성이 있다. 다만, 인간은 하나의 객체이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가지 경험을 한꺼번에 할 수가 없고, 그렇다 보니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마련이다. 남의 말에만 귀를 쫑긋 세우고 그에 따라 판단하는 팔랑귀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는 것 또한 그다지 현명하지 않다.
나 또한 한 명의 개인이기에, 내가 속했던 조직 외에 다른 회사들은 어떤지, 친구를 통해, 혹은 바람결에 들려오는 풍문으로 접할 수밖에 없으니, 내가 겪은 조직 생활과 다른 조직과 비교하는 일 자체는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게 반드시 옳은 비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말이지만, 다른 큰 조직들도 다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속했던 조직 또한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이 공존하는 그런 곳이었다.
김 부장 같은 스타일의 좋은 점은 당장은 내 상황에 공감해 주고, 내 고민을 들어주는 것 같아 보인다. 도 부장 스타일의 장점은 전체 조직 내에서 내가 속한 팀의 위상이 높아지니, 맡은 업무의 가치가 중요하게 되고,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자잘한 생채기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결론은 그 어느 쪽 스타일의 리더더라도,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 김 부장도 도 부장도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누구일까? 결국 둘 중에 누가 정답이라고 결론지을 수 없다, 조직 생활에서는. 결론은 각자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