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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시 대체가능한 자의 업무능력이란

by 조대리

대기업에 입사한 지 5~6년쯤 되어, '주무대리'로 부서 내에서 맡은 업무가 거의 나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고, 회사 내 다른 팀과의 소통 창구 역할을 도맡으며 기세등등하던 시절. 친구가 내게 넌지시 자기 계발서 한 권을 권했다. 워낙 훑듯이 대충 읽고 난 터라 세세한 내용을 온전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책의 초반 내용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대개 회사원들은 자신의 직업을 '회사원' 혹은 '직장인'이라고 쓰지만, 그 회사라는 울타리는 영원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당시) 월급을 받으며 하는 회사에서의 일과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이후, 먹고사는데 직접적인 동력이 될 일을 구분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고, 당시에 그 책을 읽으면서 머리로는 그럴 수 있겠다며 수긍하면서도, 잦은 해외 출장을 오가며 작성하는 입국신고서의 직업란에 나는 여전히 '회사원'이 아닌 다른 단어를 생각해내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낼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회사에 가지는 기대감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업종을 불문하고 구성원이 믿지 말아야 할 회사의 거짓말은 일맥상통할 것이다. 그중 으뜸은 '너 아니면 이 일을 누가 하겠냐'는 상사의 간절함을 가장한 새빨간 거짓말이다.


연차가 쌓이면서 맡은 업무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드높이기에, 저 말보다 더 솔깃한 표현이 또 있을까. 나 아니면 안 될 일, 그러니까 맡은 바 업무를 제대로 해내야겠다, 해내고 싶다는 다짐!


"우리 회사는 나 아니면 돌아가질 않아."

"내가 관둬봐라, 회사 업무 다 올스톱이지."

"도저히 너를 대체할 다른 인물이 없다."


모두 거짓말이다. 어느 개인이 빠지더라도, 그에 대체할 인물은 넘쳐나고, 구성원 하나가 관둔다고 해서 업무가 멈출 회사라면 애초에 회사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회사이다.




나의 경력 중 대부분을 차지했던 '한국 영화 해외 배급'은 크게 영화를 해외 배급사에게 팔아야 하는 '세일즈'와 세일즈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기 위한 밑작업부터 판매 후 배급을 위한 소재 전달과 관리 등을 아우르는 '마케팅'으로 나뉜다.


회사에 따라 세일즈와 마케팅을 병행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다녔던 회사처럼 세일즈와 마케팅을 구분해서 인력을 운용하기도 했다. 칼 같이 나눠서 업무를 진행하는 경우의 장단점은 명확했다. 각자 파트별로 업무의 전문성을 고양한다는 취지에도 부합했고, 상대하는 해외 배급사의 담당자들과의 일관된 소통이 가능했기에 업무 효율성은 괜찮은 편이었다.


세일즈는 말 그대로 '돈을 벌어들이는' 쪽이었고, 마케팅은 '돈을 쓰는' 쪽이었으나, 비슷한 직급의 사원, 대리들이 과장, 팀장의 지휘 하에 옹기종기 일을 하던 입사 초중기에는 도드라지는 갈등도 없었고, 업무에 대한 만족도도 높았고, 무엇보다 내가 속한 회사에 대한 자부심까지 드높았으니, '회사원'이라고 직업난에 적을 때마다 직접 쓰지는 않더라도 자랑스러운 회사 이름까지 무의식적으로 표시되는 듯했다.




한 번은,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데, 아들이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회사에 다니는 건 알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어머니가 질문을 하셨다.


"그래서, 네가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뭔데?"


지나고 보니, 3색 우산 아래 안락한 직장 생활에 만족하며, 십수 년 동안 경력기술서 한 번 업데이트하지도 않고, 마치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는 정년퇴직이 나는 가능하지 않을까, 착각했던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어야 했다.


해보지도 않은 이직 면접에서 질문을 받은 듯, 내가 맡은 업무의 시작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설명을 했지만, 듣고 있는 가족들의 눈망울은 허공을 달리는 것이 감지되었으니, 이것이 내 말발의 한계인건지, 내가 맡은 업무의 한계인건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언젠가 당시 상사와 점심시간 어느 커피전문점의 야외 테이블에서 담소를 나누던 중, 훤칠한 청년 하나가 상사에게 다가와 넙죽 인사를 하며 명함을 건넸다. 그 사람의 이름도, 명함에 적혀있던 회사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람이 인사를 마치고 가자마자 상사가 말했다. 자기 팀에서 일했던 친구인데 이직했다며, 이직을 주기적으로(?) 하다 보니, 직급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 그 말을 들었을 때에도, 뭔가 경종이 울렸어야 했다.


한 회사에서 10년 이상 장기근속을 하는 자는 뭔가 무력한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가는 듯하고, 때맞춰 이직을 하는 자는 기회라는 열매를 적절하게 따먹으며 연봉도 직급도 덩달아 뛰어오른다. 둘 중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린 것은 없다. 내가 만약 이직 시장에 뛰어들었을 때, 어떤 식으로 점프를 했을 지도 알 수 없지만, 그런 점프가 보장되었을 것이라 확신할 수도 없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좋아서, 회사가 내게 주는 여러 가지 혜택이 아쉬워서, 무엇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좋아서... 이직하지 않을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자기 계발서를 통달하지도 않은 주제에, 나의 경험과 과거를 비추어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대기업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안락함을 느끼며 이직을 계획하지 않았던, 통칭 '사무직'을 담당하는 '회사원'으로서 경력기술서의 대부분을 채운 자의 미래는... 아쉽게도 밝지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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