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모로코 다음 행선지가 방콕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타고 내려가려 했는데, 황열병 예방 접종을 못한 데다 비행기 노선이 너무 복잡하고 왠지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아서 바로 방향을 틀었 다. 역시 계획은 변경되기 위해 있는 거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때론 체크아웃하고 떠나는 당일 아침까지도 어디로 갈지 못 정한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그냥 기다렸다. 언제나 그렇듯 내 가슴 네비게이션은 틀린 적이 별로 없었기에 가슴이 바라는 방향대로 움직였다. 그러면 대부분 기대 이상으로 결과가 좋았다.
이번에도 방향을 틀어 ‘이제 동쪽으로 가자~’ 하고 방콕행을 결정했다. 역시 방콕만 와도 마치 내 집온 것마냥 마음이 푸근해졌다. 동유럽부터 아프리카까지 멀리 가 있을 때는 그 생경함과 다름이 좋기도 했지만, 다른 만큼 혼자 얼마나 긴장하면서 여행했는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방콕 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니 연세 지긋한 기사가 ‘아이 엠 타 이, 알 유 싱가폴?’ 하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니 ‘오우 쏘리’ 하며 멋쩍 게 웃는다. 비행기가 연착에 연착을 거듭한 후 구사일생처럼 도착한 뒤라 진이 빠져 아무 말 없이 그저 숙소까지 무사 배달되기만을 바라 는데, 기사는 내게 말이라도 걸어야 친절한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동안 동유럽에서부터 동남아인으로 오해를 많이 받았기에 새롭진 않았지만 막상 동남아 현지에 와서 동남아인으로 인정받으니 기분이 묘해지긴 했다. 아무래도 이 동네에 자주 오라는 신의 뜻일는지.
맛있는 태국 음식들
방콕 첫 날, 심카드를 사려고 숙소에서 물어 스카이트레인(Skytrain) 을 타고 시내로 나갔다. 거기서 또 묻고 물어서 MBK라는 어마어마 하게 큰 쇼핑몰 4층에 가서 심카드를 샀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온갖 상품들로 진열된 가게들이 현란하다. 신던 샌들도 끈이 떨어져 편한 신발을 하나 사고 어슬렁거리다 푸드코트에 가서 고기가 들어간 누들국을 먹었다. 60바트(우리 돈 2,000원)였는데 맛있고 든든했다. 물론 여기도 비싼 곳은 150~300바트도 하는데 쇼핑몰 푸드코트는 재래 시장 물가다. 길거리 음식도 다 맛있는 게 방콕의 매력인 것 같다.
생각해보니 아침, 점심, 저녁을 쌀국수, 똠얌꿍, 팟타이를 먹었는 데도 속이 부대끼거나 질리지 않는다. 여행을 시작하고 5개월간 김치가 생각난 적도 밥이 그리운 적도 없었다. 유럽 여행과 지중해 여행 때는 샐러드와 토마토가 들어간 요리를 자주 먹었기에 내 입맛이 지중해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라오스나 말레이시아에서 비슷한 음식을 먹었지만 그렇게 맛있다고 느끼진 않았다.
이븐 바투타가 중국이 음식이 발달한 나라라고 했다는데, 나는 베이징에서는 베이징덕(북경오리)을 손도 못 댔다. 그런데 태국 요리는 입에 잘 맞았다. 라이트하면서 매운맛조차 라임과 견과류 가루를 뿌려 상 큼하고 고소하다. 우리 음식보다 약간 달달하긴 하지만 맵고 짜지 않아서 먹기도 편했다.
어차피 여행은 만행이다 배를 채우고 나니 특별히 갈 데가 없었다. 다 비슷비슷한 쇼핑몰 이고 화려한 호텔이다. 구글 지도를 보니 근처에 사원 이름이 뜨기에 어차피 태국은 불교국이니 사원 구경이나 하려고 찾아나섰다. 가다 보니 길을 잘못 들어 시암 쇼핑몰과 시암 호텔 앞에서 계속 빙빙 돌고 있었다.
헤매고 다니는 내 모습이 한심해 헛웃음이 났다. 그러다 ‘그래, 어차피 여행은 만행(萬行)이라고 생각하자, 아니 더 나아가서 수행이라 생각하자’며 마인트 컨트롤을 했다. 사원을 찾아가는 동안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지만 먹고 쉴 수 있 는 곳이 보여도 그냥 지나쳤다. 부처님 고행의 몇백만분의 일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도착해서 보니 도심의 빌딩과 함께하는 사원이었다. 도심 속 사원의 의미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불이(不二)라~’
사원과 5감을 충족하는 빌딩들로 그렇게
내 눈에 방콕은 온통 먹고 소비하는 자본주의 세상의 절대치를 보여주는 듯했다.
▶ 소고기에 숙주, 고수나물 아삭한 것을 얹은 쌀국수가 2,000원이다.
▶ 서쪽을 여행하면서 늘 국물이 고팠는데...똠양국같은 걸 첫날 먹으니 집에온 거 마냥 속이 편하고 맛도 괜찮았다
▶ 어딜가나 고추를 썰어 넣은 소스를 알아서 끼얹어 먹으라고 같이 준다.
▶단호박과 내장 같은 걸 볶아 밥 위에 얹어주는데 1,400원이다.
태국은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를 겪지 않고 주권을 지켜온 나라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이 밀고 들어올 때마다 팔 하나 떼 주고 다리 하나 잘라 주면 서 견뎌왔다 한다. 그래도 동남아에서 젤 센 나라였기에 그것이 가능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친서방 정책을 펴고 퇴폐 관광업조차 용인한 왕가 때문에 태국 자체가 순수함을 잃은 면도 있다.
그런 도심 속 사원에서 사람들은 꽃을 바치고 초를 켜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속에 물질과 정신이 따로가 아니요, 중생과 깨달 음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 메시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새는 양 날개로 나니 둘 다 필요하고 둘 중 어느 하나를 도외시하거 나 경시해서도 안 되는 그것이 중도요 지혜라 생각한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오직 알라 유일신을 믿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기도 시간을 지키던 모로코에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풍경인 태국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