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면서 시차 적응이 안 된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좀 심했다. 초저녁 잠이 많고 아침형 인간인 내가 새벽 4시에 자고 점심때 일어났다. 한국과 시차가 7~8시간 나는 곳에서 150일 정도 지내 다 시차가 2시간 되는 방콕으로 왔더니 정확히 5시간 동안 시차 적응 하느라 힘들었다.
비행기 연착으로 하루를 까먹고 오전은 자느라 이틀을 버리니 방콕에서는 무얼 보고 할 것도 없었다. 아쉽지만 방콕은 그냥 지나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편안한 곳에 가서 긴 호흡으로 쉬고 싶다는 생각에 치앙마이로 가는 기차를 서둘러 예약했다.
수상시장은 꼭 가 고 싶었는데 서둘러 떠나는 바람에 못 봐서 아쉬웠다. 치앙마이로 출발 다음날 11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치앙마이로 갔다. 기차에 대우건설이라 적혀 있는데 무궁화호 내지 비둘기호 같았다. 기차에서 먹으라고 밥이랑 과자 봉지를 주는 게 재밌었다. 경치나 감상하며 가려했건만 시차 부적응으로 제대로 못 잔 탓에 가는 내내 먹고 자고 화장실 가느라 지루할 새도 없이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태국 북부 지역은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란나 왕국이 지배했는 데, 란나 왕국의 첫 번째 수도가 치앙라이였다. 그런데 잦은 홍수와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침입을 피해 치앙라이 인근으로 천도를 했는 데, 그곳이 바로 치앙마이다. 그 후 700년 동안 왕국의 수도로 존속했기에 치앙마이에는 문화재가 많다. 또한 북부 지역이라 시원하고 수려한 자연환경과 저렴한 물가, 좋은 인터넷 환경으로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 자유 여행의 메카로 각광받고 있다.
시내 주요 교통수단은 툭툭이와 빨간 썽태우다. 스쿠터를 빌려 타고 다니는 외국인도 보인다. 툭툭이는 생각보다 비싸고 썽태우는 인원이 차야 움직이니 그랩택시를 이용하는 게 가장 편하다. 그런데 택시 요금이 그리 싸지는 않다. 나는 물가를 늘 음식값과 비교하는데, 유럽에선 만 원 주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여기선 만 원이면 내가 좋아하는 팟타이를 네 그릇이나 먹을 수 있고, 마사지를 한 시간 반 동안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택시비가 아까워 되도록이면 걸어 다녔다. 같은 돈을 쓰면서도 이렇게나 사람 심리가 다르게 작동하는구나 싶었다.
치앙만 사원
치앙마이의 볼거리는 사원과 시장이다. 시장 수보다 사원이 더 많 다. 이곳 사람들의 불심과 기도는 일상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다. 구글 지도를 켜서 숙소에서 가까운 치앙만 사원에 가보았다. 치앙만 사원은 치앙마이로 천도한 후 왕사로 사용했던 치앙마이 최초의 절이요 가장 오래된 절이다. 생각보다 고요해서 좋았다. 마침 한 무 리의 신도들이 와서 절을 하고 스님의 법문을 듣는 시간이 있기에 나 는 법당 안에 놓인 의자에 편히 앉아 그들을 보며 시원한 곳에서 땀을 식혔다. 정원에 있는 황금 체디(탑)는 실물 크기의 코끼리 15마리가 떠받치고 있는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이다. 그 옆에는 3겹 지붕으로 된 불당이 있고, 그 안에 2,500년 전의 대리석 불상과 1,800년 전의 작은 크리스털 불상이 있다
▶ 가정집 앞에도 불탑 같은 것이 있다 ▶ 올드타운의 타패 게이트
법문 하는 스님을 듣고 있는 신도들 / ▶ 코끼리상이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치앙만 사원
시주함안에 쌀국수,치약등 생필품이 들어있는 것이 재밌다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이 치앙마이를 찾는 이유
치앙마이 예술문화센터에 갔다. 보고 나니 이름이 역사문화센터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에 완성된 센터인데 치앙마이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란나 왕국은 버마와 태국에게 양쪽으로 점령당했다가 태국이 버마와의 전쟁에서 이기자 1774년에 공식적으로 태국의 일부가 되었 다. 18세기 이후에 합병된 것이므로 치앙마이는 방콕이나 다른 지역과는 지역 특성이나 분위기가 차이 날 수밖에 없다.
건물 앞에는 삼왕상이 있다. 삼왕은 치앙마이로 천도한 멩라이와 수코타이 왕국의 람캄팽, 파야오 왕국의 음암므앙이다. 한 나라든 도시든 제대로 알려면 시공간의 날줄과 씨줄이 얽히는 이런 공간을 한 번은 와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서 나오면 바로 길 건너 맞은편에 치앙마이 민속박물관이 있다. 한꺼번에 치앙마이를 이해할 수 있는 두 곳이 연결되어 있어 동선이 편하다. 문화센터에서 좀 부족했던 지역 문화와 종교에 대해 좀 더 깊이 알 수 있는 곳이다. 치앙마이 중심가의 인구는 그리 많지 않 은데도 매년 약 100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것은 다른 매력과 인프라도 있겠지만, 500년 넘게 존속해 온 왕국의 문화와 유적, 유물이 한몫하지 않나 싶었다.
도이수텝에서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다
내가 머무는 곳이 올드타운이라 예쁜 카페와 핫플레이스가 있는 신시가지로 가려고 택시를 탔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가 가다가 손으로 산 위를 가리키면서 저기 가봤냐고 물었다. 도이수텝 사월이었 다. 유명한 곳이라 나도 찾아보긴 했는데, 산길로 고불고불 15 킬로미 터는 올라가야 하니 길이 험하고 멀다. 아저씨가 지금 거기로 왕복해 서 가자며 흥정을 한다. 순간 나도 낚여서 흥정을 하고 있었다. 이왕 말 나온 김에 갔다 오지 싶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부처님 사리가 있는 도이수텝
‘태국을 방문하는 사람 중에 치앙마이를 방문하지 않은 사람은 태국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치앙마이를 방문한 사람 중에 도이수텝을 방문하지 않은 사람은 치앙마이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정식 이름은 왓 프라탓 도이수텝인데 ‘왓 프라탓’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원’이고 ‘도이수텝’은 신성한 산이란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란나 왕국 때 흰 코끼리가 부처님의 사리를 싣고 수텝 산마루까지 올라가 그 자리에서 울고 세 바퀴 돌더니 쓰러져 숨을 거두었는데, 그 자리에 탑을 세워 사리를 모시면서 해발 1,070 미 터 높은 곳에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300계단을 걸어 올라 가야 했었는데, 지금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올라간다. 도시 야경을 보러 저녁 무렵에 많이 찾는다고 한다. 해발 1,000미터의 뷰 도 좋지만, 도이수텝의 백미는 황금 체디다. 흰 코끼리가 모셔온 부처님 사리가 안치된 황금 체디 주위에는 사람들이 꽃을 들고 소원을 비는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나도 함께 한 바퀴 돌며 소원을 빌었다.
미슐랭 식당이 왜 이래?
도이수텝을 뒤로하고 신시가지에 있는 카페를 찾아갔는데 건물이 텅 비어 있었다. 코로나 여파로 문을 닫은 듯했다. 다른 곳이라도 들어가 보려고 검색을 해보니 근처에 미슐랭 유기농 식당이 있었다. 길거리 음식만 먹지 말고 균형감 있게 미슐랭도 함 먹어 줘야지~ 하고 들어가서 음식을 시켰는데, 내가 잘못 시킨 건지 누들은 안 나오 고 샐러드만 나왔다. 누들을 다시 주문해 다 먹고 계산을 하다 깜짝 놀랐다.
가격도 비싸고 서비스 요금까지 붙어 평소 먹는 음식값의 4 배 가까이 나온 것이었다. 미슐랭 식당은 역시 나랑 안 맞는구나 싶 었다. 예전에 가족여행 중 파리에 사는 후배가 알랭 들롱도 다녀갔다는 미슐랭 식당에 우리 식구를 초대해서 저녁을 사주었는데 나중에 계 산서를 보고 가격에 놀라고, 일반 맛집보다 특별할 것도 없는 데다 양도 적어서 더 화가 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미슐랭-맛이 없는 건 아닌데 짜다 ㅠㅜ
식당에서 나와 맞은편에 있는 마야백화점 푸드코트에 가니 내가 먹고 싶었던 똠얌 국수가 단돈 1,800원이었다! 미슐랭 식당에서의 찜 찜했던 기분도 만회할 겸 한 그릇 먹고 위층으로 올라갔는데 또 다른 음식들이 즐비했다! 아쉽게도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지 못했다. 꼭대기층까지 올라가 보니 옥상 카페에 작은 평상 같은 의자들이 있어 사 람들이 노트북을 하며 쉬고 있었다. 나도 거기 앉아 한참을 쉬었다.
▶ 도이수텝 사원 네 기둥에 코끼리 전설 등 여러 스토리가 조각으로 새겨져 있다
▶ 도이수텝에서 보는 시티 뷰
▶ 사리를 모신 황금 불탑
▶ 마야백화점 앞에도 작은 사당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야, 즉 환상이란 부처님 가르침처럼 백화점이야말로 환상을 채우는 모든 것으로 가득 찬 곳이다. ▶ 시주 바구니에 쌀국수랑 치약도 있어 재미있다. 이런 생필품 보시가 돈보다 정겹다.
우몽 사원
구글 검색을 하니 가까운 곳에 우몽 사원(Wat Umong)이 있었다. 동굴 사원인 데다 주변에 호수와 산책로가 있다는 설명에 툭툭이를 타고 찾아갔다. 툭툭이는 재미있기는 한데 덜컹거려 안정감이 없다. 오후 5시가 넘어 도착한 탓에 입구 쪽에 사람이 없었다. 조용하고 적막한 기운이라 명상하기 좋아 보였는데, 명상센터도 있고 흰 옷을 입고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둑해져 와서 급한 발걸음으로 올라 가니 거대한 탑이 보였다. 황금빛 체디를 보다 자연 돌탑을 보니 마치 캄보디아 같은 느낌도 들면서 고답스러웠다. 반면 동굴 사원은 인 공 동굴이라 별 다른 감흥을 못 느꼈다. 굴 속에 안치된 불상만 보고 서둘러 내려왔다. 사원 주위의 종을 다 울리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하 는데 시간이 늦어 종을 몇 번 친 뒤 툭툭이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밀랍스님 실물같다 ㅎㅎ / 파를 뚝뚝 잘라 먹으면 맛있는 볶음국수
냉비빔국수같은 Papaya 파파야 샐러드 / 나가가 있는 사원
허리는 굽어도 눈빛은 형형한, 살아 있는 진짜 스님같은 모습이었다.
▶ 우멍 사원 탑
농부악 공원 / 나무에 걸린 글귀가 마음에 와닿았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 우리가 선택하 고 우리가 취하는 태도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호텔조식 / 농부악공원 쉼터
왓 체디 루앙
왓 체디 루앙은 왓 프라싱과 함께 치앙마이 시내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사원이다. 사원에 들어서면 압도적인 크기의 탑을 만난다. 15세기에 세워졌을 당시에는 90미터에 달했으나 16세기에 일어난 큰 지진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60미터다. 금빛이 아닌 돌탑이라 화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세월의 흔적과 함께 더욱 웅장함이 느껴진다.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탑을 수호 하는 뱀신 나가(Naga)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기단 둘레에도 역시 수 호신으로 여겨지는 코끼리상이 있다. 돌탑의 고색창연함은 저녁에 노을이 질 때 더욱 아름답다 한다. 사원 입구에 있는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수호나무도 인상적이었다.
왓 프라싱
거대한 탑처럼 생긴 왓 체디 루앙을 보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왓 프라싱을 찾아갔다. 왓 프라싱은 치앙마이 경찰서를 지나 선데이마켓이 열리는 올드시티의 중심에 있다. 아름다운 금탑과 법당 안에 실물처럼 앉아 있는 밀랍 고승들의 모습이 인상적인 곳이다. 머리카락, 형형한 눈빛, 검버섯 피부까지 정 말 살아 있는 듯 생생해 가까이 가서 보고는 더욱 놀랐다. 그리고 19세기 중국인 화가가 그렸다는 법당 안의 벽화는 태국의 오래된 전설을 묘사한 것인데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복식이 잘 표 현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농부악 공원
두 사원을 보고 너무 더워 냉방이 잘되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 시며 사진 정리도 좀 하고 다시 걸어 농부악 공원에 갔다. 이름이 무슨 농부여서 농부랑 관련 있나 싶은데, 그게 아니고 그냥 이름이다. 공원은 크지 않은데 현지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