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장 학교를 다니면서 집을 지어야 하니 당연히 믿을 수 있는 분이어야 했다. 주위에 먼저 귀촌하여 집 지은 동료 교사들 몇 분 말을 들어봐도 집 짓는 일이 쉬운 일도 예사로운 보통 일도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떤 분들은 집 지으려면 옆에 사람이 꼭 붙어있어야 하니 나중에 퇴직하고 나서 시작하는 게 낫다고 했다.
그러나인생 모든 게 다 제 때가 있어 인생은타이밍이라 보는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설령 시작해서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나는 마음이 동하면 바로 시작하는 타입이다. 거의 대부분^^
해서 그간 같이 명상공부도 하며 알게 된 도반 중에 목수님이 계셔 그 분께 일임을 했다.
그 목수 도반님이랑 내게 집과 땅을 소개해 준 지인도 다 서로 아는 사이였다.
그렇게 모든 걸 맡기고 시작한 일인데 목수님이 데려오시는 분들이 다 타 지역 분들이라 집 짓는 6 개월 동안 숙식할 장소가 필요했고 마침내가 집 짓는 바로 아래에 빈 집이 있어서 그걸 수리해서 쓰기로 했다.
인건비 빼고 수리 자재비용만 천 만원이 넘게 들었는데 나는 멀리 있는 집 주인에게 전화해서 일단 내가 필요해서 고쳐서 쓰니 나머지 몇 년은 그냥 내가 사용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주인과 전세 계약을 마치고 헌 집을 새 집처럼 고쳐서 그 곳에서 6개월동안 일하시는 분들이 편히 지내며 집을 지었다.
그러나 일단 숙박문제는 해결했는데 식사문제는 내가 출근하니 점심은 인근 식당에서 해결하면 되지만 일 하시는 분들 중간에 간식도 따로 못 챙겨드리니 저녁과 아침밥은 내가 해 드리기로 했다.
퇴근하자마자 마트 들리고시장을 보니 양 손에 검은 봉다리 두 개씩 들고 그렇게 부랴부랴 공사현장으로 달려갔다.
도착하면 쌀부터 씻어 밥솥에 앉혀놓고 현장가서 그 날 그 날 한 일을 체크했다.
남편은 주말에만 오니 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급하면 자재도 사다 나르며 그렇게 밥도 하면서 공사 마감까지 근 6개월을 함바식당 아줌마로 살았다. 저녁을 해 드리고 솥에 국과 밥을 남겨두면 이튿날 아침까지도 드실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도 나고 그 때는 어찌 그리 에너지가 넘쳤을까 싶기도 하다 ㅎㅎ
그 6개월이 학교에서는 신나게 아이들이랑 지내고 다시 달려가서 밥하고 인부들 독려하면서도 즐겁기 만한 시간들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해주는 밥 먹다가 주말에 본가에 가니 입맛이 없어서 밥을 못 먹겠더라는 연세드신 분 말씀에 웃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던 나는 ‘사랑과 정성으로 지은 밥이어서죠’ 하면서 맞장구쳤다. 정말 같은 음식이라도 사랑과 정성이 들어가면 맛있다는 건 다들 인정하는 바이니
별 거 아닌 식재료로 반찬을 만들어도 금방 한 건 다 맛있고 밥도 금방 지은 새 밥이 맛있고 일한 후에 먹는 밥은 꿀맛일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막걸리 한 사발은 기본이었고 안주 꺼리 반찬으로 특별한 것이 없으면 부추전이라도 꼭 해 드렸다.
충청도 분들이 대부분인데 동태탕을 내가 너무 멀겋게 국처럼 했다가 퇴짜맞고 다시 국물 자작한 탕을 두부 넣고 맵싸하게 해드렸드니 그제사 제대로 했다며 웃으셨던 기억, 다 집과 관련된 소중한 추억들이다.
내 집 짓느라 수고하시는 분들인데 뜨끈하게 주무시고 맛나게 밥을 드셔야 나도 낮에 못 가 봐도 마음이 편하고 서로 믿고 건축을 맡길 수 있겠다는 마음이었다.
정말 그 덕분인 지 집은 큰 사고없이 무탈히 잘 완공되었다.
나중에 고쳐서 사용하던 시골집은 5년을 내가 사용하기로 했다가 2년 후 필요가 생긴 분이 계셔 무상으로 내어 드렸다. 사람이 기거하지 않으면서 겨울이면 동파 걱정에 관리하기도 힘들어 그냥 와서 지내시라고 내어드리고 나니 나도 마음이 편했다.
*함바식당~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제때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간이건물을 지칭하는 말인데 나중 광복 이후 건설 현장 안에 있는 식당을 부르는 말로 바뀌었다
저 둥근상에 내가 밭에서 뜯은 머위랑 마당에 있던 마늘쫑을 무치고 ㅎㅎ
남편이 오는 주말에는 회로 회식을 했다
우리 밭에서 난 고사리를 얹어 돼지 두루치기를 했는데 다들 맛있다고 ~그 좋은 기운으로 무사히 집을 지었다. 밥심으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