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좋아해서 여행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글쓰기 스타일은 수필이다.
나는 장거리 선수는 못되니 단거리 선수처럼 짧은 글쓰기가 내게 맞다.
A4 3~4쪽은 반나절이면 쓸 수 있고 그런 호흡을 좋아한다. 그래서 소설은 엄두도 못 내고 나랑 맞지 않다 여겼다.
그런데 내 속에서 내 궁극적 도달점은 SF 소설이라고 뭔가가 말하고 있다.
나는 AI나 다가올 문명에 대해서도 예의주시 관심을 갖는 편이다.
그래서 일단 SF 소설에 관심을 가져보기로 한다. 내 성향은 꽂히면 바로 하고 집중력은 뛰어나나 지구력은 없다. 이유는 나는 무엇이 되었건 지루하거나 지치게 하는 건 그것이 황금 이라 해도 노 땡큐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활 예술인 Life Artist 스타일이다.
예술을 위해 내 현재의 삶을 저당 잡히거나 희생하길 절대 원치 않는다.
왜냐면 내 삶 자체가 예술인 '예술같은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SF는 Science Fiction의 약자다. 지금 우리는 과학 문명의 거의 끝에 와 있기에 SF라는 장르로 글을 쓰는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굳이 과학이 아니더라도 지금은 과학과 고대신화가 만나는 시점이기도 하니 일반적인 3차원을 넘어가는 이야기는 다 SF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본다.
사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설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대체로 공상과학이나 짧은 철학 등을 혼합하여 글을 쓰니 SF 작가라 할 수 있다.
‘가장 SF다운 SF를 쓰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 김보영의 '저 이승의 선지자' (The Prophet of This World)란 책을 소개해본다. 소설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개인적으로는 대부분 그리 상상하거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이어서 재밌게 읽었다.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나?
나는 육체는 한 줌 재로 화 하지만 영혼은 개체의 독립성과 기억을 어느 정도 간직하면서 더 큰 Identity 에 합류한다 본다. 그리고 다시 다른 육체를 빌려 태어난다고 생각다.
물론 죽음과 환생 그 사이 동안 머무는 장소는 영계라 해 두자.
사실 시간도 3차원에서만 구분되지 그 너머 다차원 세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처럼 그런 선명한 구분이 없다 본다.
그런 시간관념으로 ‘시간은 없다’ 혹은‘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고도 하고 평행우주론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공간이란 것도 다차원계에서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개념과는 다를 것이다.
사물이 원하는데로 바로 만들어지고 원하는 곳으로 순간이동이 이뤄지고 벽도 뚫고 나가는 입자화된 몸은 책 속에서처럼 벽과 내가 하나도 될 수 있게 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오는 목적은 영체로는 체험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직접 몸의 감각을 가지고 감정적으로 경험해보기 위해 몸을 갖고 오는 것이다.
영체는 절벽에 떨어져 바닥에 부딪혀도 감각이 없기에 통증을 느낄 수가 없다.
영혼이 몸을 가진 채 자신이 선택하는 다양한 관계, 활동을 통해서 체험하고 배우는 전 과정이 삶이다. 그리고 죽으면 다시 몸인 육체를 옷처럼 벗어두고 그 체험치와 기억을 가지고 가서 다른 세계에서 합류하여 쉬다 다시 환생을 거듭할 수 있다.
그런 맥락속에서 아래 소설을 읽으니 작가의 생사관이나 철학적 깊이도 느껴졌다.
'그 세계는 허상이다..........
나는 입에 밴 말을 읊조렸다. 나 또한 학생들을 하계로 보내며 닳도록 했던 말이다.
"육신은 허상이다. 너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다. 모두가 이어져 있다. 잊지 마라."
'잊지 마라......
모순적인 지시다. 아이들은 잊는다. 잊을 수밖에 없다.
기억을 지우는 약을 주고 하계에 내려보낸다. 잊게 하고 다시 기억하라니, 이 무슨 고약한 장난질일까. "
저자는 우리가 하계(이승)에 올 때 모든 기억을 지우고 단지 새로운 체험을 하고 배움을 얻기위해 온다고 본다.
"아만은 분열의 가르침을 펴는 자다. 허상일 뿐인 이승의 삶이 진실이라 믿는 자다. 아만은 하계가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나머지 이제 명계의 실체마저 의심한다. 그러니 내가 아만과 섞이다 보면 합일의 어느 시점에서 내 신념이 변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나는 최후까지 나반이어야 한다."
그런데 너무 이승의 삶에 몰입하거나 집착하여 돌아갈 명계(영계, 저승)조차 잊어버린 자를 소설에서는 ‘타락’한 것으로 보고 그렇게 타락한 영혼과는 합일을 꺼리게 된다.
타락의 특징은 다양한데, 지금의 3차원 육체인 몸이 자신의 진짜요 전부라고 믿고, 자신과 타인을 완전히 구분해 생각한다.
현재의 일시적인 인격에 과하게 집착하니 그 인격의 종말인 죽음을 자신의 소멸로 인식하고
(죽음은 소멸이 아닌 형태의 변화일 뿐)
현재 상태에 집착하기에 몸을 변형시키지 못하고, 사후에도 합일을 위한 설득이 통하지 않는 것을 ‘타락’이라 본다.
소설 속에서 이런 타락한 개체는 합일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치유법이지만, 합일한 쪽이 오히려 오염될 위험이 있으므로 주로 격리한 뒤 치유되기를 기다렸다가 합일한다.
여기서 ‘타락’이란 용어는 기독교의 성경에서 에덴에서 쫒겨나는 아담을 떠올린다. 신과의 분리가 이뤄지는 상황이 바로 인간 타락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타락한 자는 세상 전체가 자신인줄을 모른다. 자신과 남이 같은 줄도 모른다. 공감할 줄도 사랑할 줄도 모른다. (P.79)
남에게 고통을 주는 만큼 공감을 잃는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것임을 잊는다 (p.136)
타인이 없는 세계는 잘못은커녕 그 무엇도 없다. 가치 있는 일도 없다 (...) 그것만은 감히 ‘죄’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은 것이었다. (p.159)
합일과 분리는 소설을 이어가는 두 축이다. 합일 속에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연민과 이해와 공감과 사랑의 동력이 있다.
소설에서 영혼들은 배울 것을 찾아 하계로 내려가고 생의 목적은 오로지 배움뿐이라고 말한다. 합일 또한 또 다른 자신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는 과정이다.
각자 삶의 이유나 목적을 달리 설정할 수 있겠지만 나 또한 생의 목적은 체험 통한 배움에 있다고 늘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 체험기간인 삶 동안 신 또는 무엇이라 부르던 그 근원과의 연결을 잊지 않고 그에서 분리되지 않는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3차원계에서는 우리가 각각 분리된 개체로 존재하지만 사후 우리가 더 큰 아이덴티와 합일 혹은 합류 하게 되면 불필요한 개체성은 사라진다. 그리고 타락하지 않은 본래 생각으로는 우리는 분리되지 않았다. No Seperation! 분리는 없다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