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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Aug 07. 2024

통합지식 100 세계고전

아동 도서 열람실에서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노안언젠가는 오게 되어 있다. 돋보기를 끼고 책을 볼 정도로 눈이 침침해진 건 이제 글자책은 그만 보라는 의미라고 한다. 지금까지 본 책과 살아온 경험치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나이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미리 못 본 책은 지금이라도 보고 싶고 눈 좋을 때 더 안 본걸 한탄할 뿐이다.       


요즘은 도서관 일반열람실에서 책을 대출하고 나면 꼭 어린이 열람실에 들러 그림책 몇 권 읽고 온다. 브런치 발자꾹 작가님의 그림동화 연재도 있었지만 어쩌다 돋보기 없이도 볼 수 있는 그림동화에 빠져들었다. 슈퍼토끼 나를 돌아보다

그림동화는 재미있기도 하지만 내용이 깊다. 오죽하면 어른동화라 하고 싶을 정도로 뼛속 깊은 교훈이 언중유골, 화중유골로 그 안에 가득하다.      


그림동화를 보고 나오려다 책 두 권이 눈에 띄어 좀 무거운 책이지만 백 팩에 넣어왔다. 그냥 재미 삼아 읽으려다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오 마이 갓~! 요즘 초등학교 수준에 놀란다.


말은 초등교육과정에 포함된 거라는데 나열된 100개 작품 중에서 우리 때는 고등학교 대학교 때나 읽었던 제목들이 수두룩하다. 하기사 요즘 아이들의 조숙함을 뭘로 다 표현할까마는 그간 교육과정의 변화도 느낀다. 이 책에 수록된 100개 중에서 나에게 새삼스럽게 다가왔던 몇 작품을 함께 나눠본다.        


 




사뮤엘 베케트의 1952년 작품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나는 대학 연극 동아리에서 선배들 공연으로 처음 만났다. 그 후  ‘En Attendant Godo “를 불어 원서로 읽었다.      

연극은 흔히 우리가 아는 기승전결이 없다. 행색도 초라한 두 주인공 고고와 디디가 앞뒤도 없고 맥락도 없는 대화를 나누며 그냥 무작정 마냥 뭔가를 기다린다. 고도라는 그 기다림의 대상이 신일지 희망일지 그 무엇일지는 끝내 뚜렷하지 않다.       


산업화와 과학의 발달, 제국주의가 가져다준 부로 흥청이던 유럽은 1.2차 양차 대전으로 거의 초토화되었다.


그렇게 유럽은 잿더미가 된 후 지금껏 이뤄왔던  문명과 믿어왔던 종교, 철학적 이념과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와 절망감으로 가득 찼다.      

그런 상황에서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모순된 모습을 부조리극이라는 새로운 연극의 형태로 담았다. 저자 베케트는 기존의 가치관과 모든 것이 무너진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인내, 희망이 필요하다고 여겼나 보다.     


고도는 누구일까? '고도'라는 인물은 끝내 등장하지 않고 단지 소년을 통해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는 소식만 보낼 뿐이다. 많은 이들이 '고도'의 정체를 궁금해했지만, 베케트는 고도가 누구며 뭘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장폴 사르트르의 구토 (1938년)도 나는 대학교 때 읽었다.

주인공 로캉탱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어느 날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던 그는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의미 없이 존재한다고 여겨지자 구토를 느낀다. 구토증세는 점점 더 심해지는데 주인공은 그 가운데서도 진실한 자신을 찾는 여정을 계속해간다. 그러면서 그를 막는 모든 사회관계와 지식을 던져버리고 오로지 자신에 대해서만 깊이 생각한다.     


사르트르는 20세기 대표적인 프랑스 작가이자 실존주의의 창시자다. 1973년 시력을 잃어 집필을 중단할 때까지 그는 철학서인 <존재와 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세상에 아무런 이유 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보았다. 인간은 우연의 존재, 잉여의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 헤매는 인간의 모습을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정상을 향해 밀어 올려야 했던 시지프스에 비유하기도 했다.    

 

1964년 사르트르는’ 말‘이라는 소설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그는 문학적 우수성을 놓고 등급을 매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에 노벨위원회의 평가기준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상을 거부했다. 비 오는 거리에서 기자들로부터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전해 들은 가 수상을 거부했던 빗속의 인터뷰 영상은 역사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오른쪽 눈은 시력이 거의 없는 사시였던 사르트르는 어렸을 적엔 작은 키와 왜소함으로 외톨이였으나 오직 외할아버지댁 서재가 그를 구원했다.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었다. 이것이 내 습성이고,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


사르트르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였던 알베르 까뮈가 있다. 그는 부유한 가문이었던 사르트르와 달리 알제리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스페인계의 하녀였다. 그 자신도 그런 어머니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사르트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가인 슈바이처가에서 자랐는데 우리가 아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그의 어머니와 사촌이다.   

사르트르에 비해 외모 미남이었던 까뮈는 여성편력 또한 만만찮았다. 두 번의 결혼에 이어 마지막까지도 그는 당대 최고 여배우와 불같은 사랑을 나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태생이었던 그는 프랑스사회에서 그의 작품명처럼 온전한 프랑스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 이방인‘을 느꼈을 수도 있다.


암튼 그는 1942년 <이방인>을 발표하여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고 195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안타깝게도 1960년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쳤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 날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코미디 영화를 본다. 이런 뫼르소를 통해 작가는 부조리한 인간의 삶을 보여 주려 했다.

뫼르소는 우연히 해변에서 싸움에 휘말려 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다. 왜 총을 쐈냐는 경찰의 질문에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라고 답한다.

전후 세대의 고립감, 절망감을 살아가던 주인공의 부조리함을 잘 나타낸 이 작품은 전쟁의 상흔을 입었던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프랑스 배우보다 잘 생긴 외모의 알베르 까뮈




아무튼 어린이 열람실에서 만난 이 책 덕분에 두루 나의 이전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으로 유명했던 시몬느 드 보봐르, 그녀의 여성 해방을 위한 바이블이라 불릴 <제2의 성>이 1949년에 발간되었다. 어쩌면 프랑스 68 혁명도 이 책을 읽었던 여자와 그 딸들이 이룬 연장선이었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그녀는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연인이자 지적인 동반자로 평생을 함께했다.   

   

계약결혼은 말 그대로 기간이나 의무 등을 미리 정해놓고 하는 결혼이다. 한번 결속되어 묶임으로써 평생을 가야 하는 영구 구속의 결혼이 아니다. 요즘 이혼율이 높은 것도 결혼하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봉사와 희생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어서 일 거다.


그런 지금 시대에 서로 기간을 정해놓고 진행상태를 봐 가며 결혼도 재계약한다면 쌍방의 상호존중과 노력을 더 기대할 수 있을려나!      


<제2의 성> 책 첫머리에서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자는 사회 속에서 '제1의 성'인 남자의 영향력 아래 '제2의 성'으로 길러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의 주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 걸맞은 존재로 만들어지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은 제2의 성이 아니라 다만 남성과 다를 뿐이다. 흔히 여성은 어머니로서 모성이 강해야 하고, 결혼 전까지 정숙해야 한다는 식의 사회적 요구와 기대는 동서양 사회에서 마찬가지였다. 유년기부터 '여자답게' 자라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즐겨보는 디즈니랜드의 공주는 모두가 예쁘게 자라서 멋진 왕자님을 만나는 꿈을 꾸는 걸로 나온다. 여자 스스로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 가고 성장해서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제2의 성> 은 '페미니즘의 성서'라고 불릴 정도로 페미니즘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도 여성 자신이 어떤 이유로든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일이라 본다. 그녀가 사르트르와 동등한 관계의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살았기에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었고 여성 지위향상을 위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자들이 공주가 되어 하릴없이 오지도 않을 왕자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왕자가 구하러 올 때까지 잠만 자고 있는데 보봐르는 이러한 동화들이 여성은 아름답고 순종적이며 철저히 남자에게 의존적이어야 한다는 '신화'를 만들어 여성을 길들이는 족쇄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지금도 여성 시청자가 많은 드라마를 보면 거의 동화 신데렐라급 수준이 많다.      


보봐르의 책을 보고 독설을 퍼부은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중 알베르 카뮈도 <제2의 성>이 남성성을 공격한다며 싫어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보면 떠오르는 작품과 주인공이 있다. 바로 인형의 집 ’ 노라 ‘다. 인형의 집은 1879년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대표작이다.      


쾌활하고 아름다운 노라는 은행가 헬머의 아내다. 평소 남편은 그녀를 종달새라 부르며 사랑해 주었다. 다만 노라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어쩌다 남편의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린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때부터 남편의 태도는 완전히 변한다. 그녀가 자신의 체면을 깎아내렸다며 노라에게 욕을 하고 함부로 대한다. 다행히 사건이 마무리되어 위기를 벗어나지만, 노라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그저 남편에게 종달새 인형에 불과했다고 느끼며 집을 나간다.    

 

[노라] 당신은 지금까지 내게 잘해 주셨어요. 그러나 우리들의 집은 한낱 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우리 본가에서는 아버지의 인형이었고 여기에 와서는 당신의 인형에 불과했던 거예요.

나는 당신이 나와 놀아주시면 기쁘곤 했죠.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결혼이었어요     


[남편]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신성한 의무를 저버려도 좋단 말이야?     

[노라] 내게는 그만큼이나 신성한 의무가 있어요     


[남편]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어? 그건 도대체 어떤 의무지?     

[노라] 나 자신에 대한 의무지요     




노라를 보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도 떠오른다.  


나는 두 작품을 소설로도 읽고 영화로도 보았다. 그러면서 나도 두 여주인공들이 가부장적 논리로 보면 신성한 결혼을 파괴하였기에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인과응보요 그래도 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 나이가 들어서 되돌아보니 생각이 조금 바뀐다.


비운의 여주인공들이 그런 결말로 치닫게 된 그 이면과 배경에는 숨 막히는 일상의 진부함이 있었다. 자본주의 물질 위주의 삶과 남성 위주로 이뤄진 위선적인 사회 체계가 있었다.

여자는 그저 숨죽이고 남자들이 벌어다 주는 먹이로 아이나 키우면서 살아가는 제2의 성으로서의 존재할 뿐이었다. 여자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자기 삶을 살아가기에는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엠마는 따분한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새로운 사랑을 꿈꾸고 사치를 일삼다 파멸에 이른다. 이런 엠마와 같은 전형적인 낭만주의적 인물을 플로베르는 마치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이 냉정하게 관찰하고 그려냄으로써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가 된다.


플로베르는 "내가 바로 보바리다. 프랑스 곳곳에 수많은 보바리들이 울고 있다."라고 말하며 당시 프랑스 사회에 퍼져 있던 지나친 낭만주의를 지적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엠마를 경멸하지는 않았다. 대신 꿈과 화려한 정열을 가졌지만 현실 속에서 이상이 좌절된 그녀의 내면적 흐름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사진으로 찍듯 그려냈다.     


이 소설은 당시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실화를 소재로 쓰였다. 플로베르가 살았던 19세기 프랑스는 물질적으로는 풍족해졌지만 정신적인 공허와 타락이 가득했던 시기다. 물질적 풍요 속의 정신적 빈곤으로 더 큰 만족을 꿈꾸다가 파멸하는 엠마의 모습은 당시 부르주아 계층에 퍼져 있던 정신적, 물질적 만족에 대한 끝없는 추구를 보여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80년대 이후 경제성장이 가져온 물질적 부 이면의 정신적 공허를 다룬 박완서님의 소설들이 오버 랩된다.)

     

엠마와 마찬가지로 안나 역시 일상 현실 속에서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예쁘고 총명했던 그녀가 단지 누구의 아내, 엄마라는 틀에 억눌리고 얽매여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잘 생기고 자유분방한 브론스키백작은 그런 그녀의 삶에서 신선한 돌파구였다.


허례허식으로 가득 찬 귀족사회에서 박제된 위선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정열에 솔직하고 그를 택한 것도 또한 남다른 용기였다 평가한다.      


1870년대의 러시아는 빛의 제국이라고 불릴 만큼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시기다. 경제적 풍요 등으로 상류 사회가 발달해 귀족 문화가 정점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상류 사회의 엄격한 규칙들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다. 안나의 불륜을 알고 나서도 상류 사회에서 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남편 카레닌은 안나와 이혼하는 것을 거부한다.     


스토이는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 "이 소설은 지금까지 내가 쓴 것 중 진정 내 마음을 사로잡은 최초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인 도스토옙스키 또한 "예술적으로 완벽하고, 현대, 유럽 문학 중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존재의 본질은 사랑인데 그 사랑에 갈급해 갈구하다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녀는 철로로 몸을 던진다. 모든 것을 걸었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녀가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선택에 대해서 그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물론 그녀가 상상하고 생각했던 사랑이 다소 true love에서 먼 욕정 lust가 섞인 것이었다 해도 그녀의 사랑이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상 여러 작품을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의 특성이 주제별 100가지를 선별해서 다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통합 지식 100 시리즈는 통합 교과를 지향해서 기획된 시리즈다.  

국어, 수학, 과학, 사회, 미술, 음악, 도덕 등의 여러 교과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글, 그림, 사진으로 정리해 통합 교과교육을 시도했다.

모든 작품은 초등 교과서에 언급되는 작품을 위주로 선정했다.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꼭 읽어 두어야 할 경제학, 철학서, 인문 고전을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작품을 다 포함시켰다.     


이 외에도 언급하고 싶은 작품이 많지만 그냥 여기서 그친다. 우리나라 작품 100선도 정말 읽을거리가 풍부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작품들을 시대, 역사적 관계속에서 서로 연관지어 보니 더 깊이 이해되는 면이 많았다. 이것이 교과통합적 지식의 윈윈 효과일 것이다.


   




ps~ 글을 발행하고 댓글 내용중에 공감과 우려가 있는 분들에 대해
저도 동의합니다~^^;
초등학생이 실존주의를 이해하려나?
그렇다면 일찍부터 존재의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철학적인 어린아이일거고...
이런저런 책을 단지 지식적 앎으로 취하는 것과
삶의 이해로 받아드리는 것은 엄연히 다를진대
이 책의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 봅니다~
 
갠적으로 저는 부모 불안증이 야기하는 지식적 조기교육에
관심이 없고 오직 머리와 가슴의 모든 균형잡힌 커리큘럼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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