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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Dec 11. 2024

저 이승의 선지자

SF의 대가 김보영작가

       

나는 여행을 좋아해서 여행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글쓰기 스타일은 수필이다.

나는 장거리 선수는 못되니 단거리 선수처럼 짧은 글쓰기가 내게 맞다.

A4 3~4쪽은 반나절이면 쓸 수 있고 그런 호흡을 좋아한다. 그래서 소설은 엄두도 못 내고 나랑 맞지 않다 여겼다.     

 

그런데 내 속에서 내 궁극적 도달점은 SF 소설이라고 뭔가가 말하고 있다.

나는  AI나 다가올 문명에 대해서도  예의주시 관심을 갖는 편이다.      


 그래서 일단 SF 소설에 관심을 가져보기로 한다. 내 성향은 꽂히면 바로 하고 집중력은 뛰어나나 지구력은 없다. 이유는 나는 무엇이 되었건 지루하거나 지치게 하는 건 그것이 황금 라 해도 노 땡큐 기 때문이다.

나는 생활 예술인 Life Artist 스타일이다.

예술을 위해 내 현재의 삶을 저당 잡히거나 희생하길 절대 원치 않는다.

왜냐면  내 삶 자체가 예술'예술같은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SF는 Science Fiction의 약자다. 지금 우리는 과학 문명의 거의 끝에 와 있기에 SF라는 장르로 글을 쓰는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굳이 과학이 아니더라도 지금은 과학과 고대신화가 만나는 시점이기도 하니 일반적인 3차원을 넘어가는 이야기는 다 SF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본다.

사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설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대체로 공상과학이나 짧은 철학 등을 혼합하여 글을 쓰니 SF 작가라 할 수 있다.     


 ‘가장 SF다운 SF를 쓰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 김보영의 '저 이승의 선지자' (The Prophet of This World)란 책을 소개해본다. 소설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대부분 그리 상상하거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이어서  재밌게 읽었다.      





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나?      


나는 육체는 한 줌 재로 화 하지만 영혼은 개체의 독립성과 기억을 어느 정도 간직하면서 더 큰 Identity 에 합류한다 본다. 그리고 다시 다른 육체를 빌려 태어난다고 생각다.

물론 죽음과 환생 그 사이 동안 머무는 장소는 영계라 해 두자.


사실 시간도 3차원에서만 구분되지 그 너머 다차원 세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처럼 그런 선명한 구분이 없다 본다.

그런 시간관념으로 ‘시간은 없다’ 혹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고도 하고 평행우주론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공간이란 것도 다차원계에서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개념과는 다를 것이다.

사물이 원하는데로 바로 만들어지고 원하는 곳으로 순간이동이 이뤄지고 벽도 뚫고 나가는 입자화된 몸은 책 속에서처럼 벽과 내가 하나도 될 수 있게 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오는 목적은 영체로는 체험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직접 몸의 감각을 가지고 감정적으로  경험해보기 위해 몸을 갖고 오는 것이다.

영체는 절벽에 떨어져 바닥에 부딪혀도 감각이 없기에 통증을 느낄 수가 없다.      


영혼이 몸을 가진 채 자신이 선택하는 다양한 관계, 활동을 통해서 체험하고 배우는 과정이 삶이다. 그리고 죽으면 다시 몸인 육체를 옷처럼 벗어두고 그 체험치와 기억을 가지고 가서 다른 세계에서 합류하여 쉬다 다시 환생을 거듭할 수 있다.


그런 맥락속에서 아래 소설을 읽으니 작가의 생사관이나 철학적 깊이도 느껴졌다.     

   

'그 세계는 허상이다..........

나는 입에 밴 말을 읊조렸다. 나 또한 학생들을 하계로 보내며 닳도록 했던 말이다.

"육신은 허상이다. 너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다. 모두가 이어져 있다. 잊지 마라."

'잊지 마라......

모순적인 지시다. 아이들은 잊는다. 잊을 수밖에 없다.

기억을 지우는 약을 주고 하계에 내려보낸다. 잊게 하고 다시 기억하라니, 이 무슨 고약한 장난질일까. "

    

저자는 우리가 하계(이승)에 올 때 모든 기억을 지우고 단지 새로운 체험을 하고 배움을 얻기위해 온다고 본다.      


 "아만은 분열의 가르침을 펴는 자다. 허상일 뿐인 이승의 삶이 진실이라 믿는 자다. 아만은 하계가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나머지 이제 명계의 실체마저 의심한다. 그러니 내가 아만과 섞이다 보면 합일의 어느 시점에서 내 신념이 변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나는 최후까지 나반이어야 한다."     


그런데 너무 이승의 삶에 몰입하거나 집착하여 돌아갈 명계(영계, 저승)조차 잊어버린 자를 소설에서는 ‘타락’한 것으로 보고 그렇게 타락한 영혼과는 합일을 꺼리게 된다.

타락의 특징은 다양한데, 지금의 3차원 육체인 몸이 자신의 진짜요 전부라고 믿고, 자신과 타인을 완전히 구분해 생각한다.

현재의 일시적인 인격에 과하게 집착하니 그 인격의 종말인 죽음을 자신의 소멸로 인식하고

(죽음은 소멸이 아닌 형태의 변화일 뿐) 

현재 상태에 집착하기에 몸을 변형시키지 못하고, 사후에도 합일을 위한 설득이 통하지 않는 것을 ‘타락’이라 본다.




소설 속에서 이런 타락한 개체는 합일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치유법이지만, 합일한 쪽이 오히려 오염될 위험이 있으므로 주로 격리한 뒤 치유되기를 기다렸다가 합일한다.     


여기서 ‘타락’이란 용어는 기독교의 성경에서 에덴에서 쫒겨나는 아담을 떠올린다. 신과의 분리가 이뤄지는 상황이 바로 인간 타락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타락한 자는 세상 전체가 자신인줄을 모른다. 자신과 남이 같은 줄도 모른다. 공감할 줄도 사랑할 줄도 모른다. (P.79)

남에게 고통을 주는 만큼 공감을 잃는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것임을 잊는다 (p.136)

타인이 없는 세계는 잘못은커녕 그 무엇도 없다. 가치 있는 일도 없다 (...) 그것만은 감히 ‘죄’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은 것이었다. (p.159)     


합일과 분리는 소설을 이어가는 두 축이다. 합일 속에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연민과 이해와 공감과 사랑의 동력이 있다.     


소설에서 영혼들은 배울 것을 찾아 하계로 내려가고 생의 목적은 오로지 배움뿐이라고 말한다. 합일 또한 또 다른 자신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는 과정이다.


각자 삶의 이유나 목적을 달리 설정할 수 있겠지만 나 또한 생의 목적은 체험 통한 배움에 있다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 체험기간인 삶 동안 신 또는 무엇이라 부르던 그 근원과의 연결을 잊지 않고 그에서 분리되지 않는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3차원계에서는 우리가 각각 분리된 개체로 존재하지만 사후 우리가 더 큰 아이덴티와 합일 혹은 합류 하게 되면 불필요한 개체성은 사라진다. 그리고 타락하지 않은 본래 생각으로는 우리는 분리되지 않았다. No Seperation! 분리는 없다라고 본다.     


나는 내가 비교적 오래된 영혼 Old Soul 이라 여겨서 그런지 기억들이 있다.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 의식에선 지워져서 세세한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무의식 혹은 잠재된 의식에는 희미한 흔적과 메아리가 있다고 본다.      


믿거나 말거나겠지만,


( 어렸을 적 부터 말 달리는 걸 보면 가슴이 뛰는 건 내게 인디언 전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겨울이면 털 달린  옷이 유난히 많다. 이태리의 차가운 대리석에 대한 기억으로 쇼올, 머플러에 대한 집착이 있고 봉쇄 수도원의 잔재인 지 지금의 폐소공포증으로 남아있다.

레이스 달린 옷이 많은 것도 프랑스 전생과 연관이 있다 본다. 프랑스란 나라는 나의 직전생과 전전생과도 연관이 있어 20대 절반을 그곳에서 보냈지만 그곳 문화나 사람들에 대해 전혀 이질감을 못 느꼈다 )      


“나는 계속 끌어당겼다.

생각이 밀려들었고 생이 밀려들어 왔다. 기억이 쏟아졌다. 수많은 삶이 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영양분을 피부로 받 아 마시는 생물처럼 그것들을 만족스럽게 들이켰다.

모두 귀중한 자료며 자산이다.

작은 몸을 가진 개체라 면 과다한 정보에 혼란스러워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입자 하나를 얻을 때마다 나는 더욱 위대해진다. 나는 아이사타, 태초의 자아 중 하나다.

아아, 그리웠던 고향이여, 온전한 전체여, 진리의 총합체여, 자아의 배움과 성장을 위해 제 인격을 분열하는 희생마저 감수할 줄 알았 던 위대한 영혼이여.”     


작가는 궁금해하며 상상한다.

저승에 물리적 삶이 있고 생태계가 돌아간다면 어떤 형태일까? 불멸의 생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명계라고 이름 붙인 저승이나 영혼세계에서는 성별이 없다고 했다.

남녀구분이나 흑백 논리같은 우리의 상식은 3차원계나 존재한다.

명계에서는 애초에 생식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설령 외향을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으로 꾸민다 해도 기본적으로는 중성이라 본다.     


작가는 《7인의 집행자》란 첫 장편속에서 죽음과 탄생등을 다루었는데 그기서 끝내지 못했던  사후세계 이야기를 다시 4년 후 두 번째 장편인 이 소설로 발표했다.

결코 쉽지 않은 소재와 내용에 대해서 나름 공들인 저자의 고민과 탐색을 4년이란 시간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시상하는 스웨덴 국왕과 악수하는 한강 작가


어제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수상 연회에서 한 연설의 일부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더니 하늘이 열렸다. 비가 너무 강해서 아이들이 건물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도... 여기에서처럼 만큼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쏟아지는 비와 내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나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모든 사람들과 길 건너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나’로서 살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각자 이 비를 보고 있었고, 축축함을 그들도 느끼고 있었다

경이로운 순간이었고, 수많은 1인칭 시점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그렇다. 그녀가 말하는 생명은 수많은 나와 또 다른 나들의 생명이다. 우리의 삶도 그녀가 말하는 수많은 1인칭 시점인 우리 속에 배움과 체험을 더 해가는 과정이기에 우리는 그 어떤 생명도 해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잠시 머무는 이생에서 우리가 다른 생명을 위협하는 일에 대해서는 언어란 도구를 사용하는 글로서 저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강은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난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는 수천 년 동안 문학에서 제기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가장 어두운 밤에는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묻는 언어가 있고

이 언어는 사람들과 생명체의 일인칭 관점을 상상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일인칭 관점이란?
상대 또한 또 다른 나임을 말한다.      


그래서 나 아닌 또 다른 나인 상대를
파괴하는 살상을 가장 큰 죄로 본다.
하물며 여러 사람들을
위기에 빠트리는 일이야말로
더욱 가중된 악이 될 수 있다.      



한강의 작품이 시사하는 과거의 일이 오늘 우리에게 현재 상황이 되어 있는 같은 시각,

이 국가적 상황과 그녀의 수상 소감이 함께 최근에 읽은 작품과 맞물려 주는 울림이 크다.           



#SF #사후세계 #영혼 #환생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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